본관은 풍양(豊壤). 조계팽(趙季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지부(趙之孚)이고, 아버지는 지평 세보(世輔)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22년에 정자·저작·박사를 역임하였으며, 1525년에 정언·지평을 지냈다. 1530년에 필선으로 황해도어사에 파견되어 수령들의 진휼(賑恤)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뒤 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와 전한을 거쳐 집의가 된 뒤 1534년에는 승지가 되었다.
전한으로 있을 때 그는 직제학 남세건(南世健)과 함께 정광필(鄭光弼)이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임금의 뜻만 맞추고 전하를 속여 나라를 망친다고 상소하였다. 1537년에 형조참의·승지가 되고, 다음해에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을 지냈다.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이안분(李安分)과 선위사(宣慰使)로 함께 갔다. 그 때 원접사(遠接使) 정호음(鄭湖陰)이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부사에게 화답(和答)하도록 하였다. 이안분은 붓을 잡고 시를 짓느라 정력을 이미 다하였는데, 그는 기생을 끼고 실컷 마시고는 시를 짓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다.
새벽에 이안분이 그를 깨워 준엄하게 책망하자, 그는 붓을 멈추지 않고 잠깐 동안 시를 다 지었다. 시가 간혹 하자(瑕疵)는 있었으나 매우 민첩하여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