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좌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32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추존하자는 박지계(朴知誡)의 발의에 반대하여 인조의 미움을 받아 부여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1642년 지제교에 선임되고, 이듬해 부교리 · 수찬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헌납 ·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46년 다시 헌납이 되었으나 1636년의 중시별과가 파방되는 사건이 발생, 당시 참시관(參試官)으로서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1647년 집의가 되고, 뒤에 춘추관편수관으로 『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1년(효종 2)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감사를 거쳐 1653년 정신옹주(貞愼翁主: 선조의 딸)의 예장(禮葬) 때 역군가(役軍價) 문제로 정배되고, 이듬해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고, 1657년 도승지 ·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659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성균관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했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 · 대사헌 ·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형조판서 재직 시 이갑남(李甲男)의 죄를 잘못 처리했다 하여 평산 금암역(金巖驛)으로 귀양갔다. 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 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 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1665년 지의금부사 ·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낸 뒤, 1668년 좌참찬이 되었다.
1669년 평안도 외방별시의 시관이 되고, 이듬해 좌참찬, 1673년 예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다시 좌참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1674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 『광해군일기』
-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국조방목』
- 『국조인물고』
-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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