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존자암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곳 동굴에 마치 스님이 도를 닦는 모습과 흡사한 돌이 있어 세상에 수행동(修行洞: 수행하는 동굴)이라 전해졌다.”고 한 것이 최초이다.
그런데 효종 초에 간행된 『탐라지(耽羅志)』에는, “존자암의 애초의 위치는 영실이고 지금은 서쪽 기슭에서 밖으로 10리쯤 옮겼는데, 곧 대정지경”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존자암은 효종 이전에 그 위치가 영실에서 대정지경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지금의 존자암지는 17세기 중반 이전의 존자암의 터전인 셈이다.
그러나 존자암이 어느 때 누구에 의해 건립된 암자인지, 상세한 내막을 전해 주는 문헌기록은 없다. 다만 김정(金淨)의 「존자암기(尊者庵記)」에는, “존자암은 고·양·부(高良夫) 삼성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비로소 세워졌는데, 3읍이 정립된 후에까지 오래도록 전하여졌다.”고 하였다.
존자암의 규모에 대해서는 『남사록(南槎錄)』에, “존자암은 아홉 칸인데, 지붕과 벽은 기와와 흙 대신에 판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까닭을 당시 스님과 오고간 대화 내용을 인용하여, “산중의 토맥은 점액이 없고 또 모래와 돌이 많아서 벽을 바르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기와는 반드시 육지에서 사와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593년(선조 26)에 전라남도 강진에 사는 스님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방호(防護)를 서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임무를 마치자 곧 재물을 내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 광해군 초기에 제주 판관을 지낸 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는 존자암을 정사(靜舍)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는 이곳에서 국성재(國聖齋)를 올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