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이 밖에 평상과 의자도 사용하였다. 좌상에 앉은 모습은 미천왕무덤·태성리 제1호무덤·감신무덤의 벽화에 그려져 있다. 좌상과 평상은 그 생김새는 서로 같으나 크기가 다르다. 곧, 좌상은 사람이 혼자 앉을 정도의 것이고 평상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인원이 앉을 수 있다.
따라서, 좌상은 오로지 앉아 있기 위하여 만든 것이고, 평상은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좌상이나 평상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올방자를 틀고 앉는다. 고구려시대에는 좌상과 평상을 함께 놓고 썼다. 약수리무덤 벽화를 보면, 안 칸 북벽의 주인공 실내생활도 가운데 주인공 부부가 하나의 평상에 앉아 있다.
앞 칸 북벽 벽화에는 남자 주인공이 좌상에 혼자 앉아서 여러 사람의 시중을 받는 장면과 이 주인공을 향하여 다섯 명의 시중꾼들이 하나의 평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주인공이 평상에 앉아 있는 그림은 안악 제2호무덤·사냥무덤·쌍기둥무덤에 보인다.
이와 같이, 고구려 사람들이 좌상이나 평상을 즐겨 이용하였던 것은 신을 벗는 풍습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만약, 신을 신은 채로 이들 위에 올라앉는다면 불편할 뿐 아니라 옷을 더럽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천왕무덤의 여주인공 그림에서 좌상 앞에 신을 벗어놓은 것과 일치한다.
사냥무덤 및 쌍기둥무덤 주인공 실내생활도에서 주인공 부부들이 방 밖에 신을 벗어놓은 것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고구려시대에는 신을 벗고 드나들 수 있도록 방바닥에 자리 같은 것을 깔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좌상이나 평상 외에 의자도 사용하였다. 이에 관한 그림은 씨름무덤과 춤무덤의 주인공 실내도에 보인다.
앞무덤의 경우 남자 주인공이 걸상에 걸터앉은 채 여러 사람의 시중을 받는 장면이고, 뒤의 것은 남자 주인공이 손님인 듯한 승려를 대접하는 장면이다. 주인공과 손님들은 모두 앞에 음식상을 받고 신을 신은 채로 걸상에 걸터앉아 있다.
따라서, 평상이나 좌상과는 달리 걸상에 걸터앉을 때에는 방안에서도 신을 신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의 좌상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좌탑(坐榻)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온돌과 마루의 보급에 따라 일반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주로 관청에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에서는 이를 목탑(木榻)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을 꾀하거나 칠을 하는 등의 사치를 즐기는 폐단이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에 대하여, “수백년 묵은 나무뿌리는 살이 삭고 뼈대만 남아서 그 생김이 기괴하니 그 가운데 탑모양과 비슷한 것을 고른다. 머리를 톱으로 잘라서 펑퍼짐하게 하고 다리를 만들되, 거기에 덧붙여 일절 새나 짐승의 모양을 새기지 말며, 또 주황(朱黃) 등으로 채색하지 말 것이니 속된 취미에 빠지는 것을 꺼려함이다. 때로 좋은 나무 아래에, 또는 맑은 연못가에 두고 앉을깨로 삼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설명으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오래된 나무뿌리 부분으로 좌탑을 만들어 연못이나 산수 좋은 자리에 놓고 앉아 자연경관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