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에 이곡(李穀)이 지은 산문. 작자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1349년(충정 1) 5월 16일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용연(龍淵)에서 송정(松亭) 전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사군(潘使君)과 합류하여, 이튿날 부여성에 가서 조룡대(釣龍臺)·호암(虎巖)·천정대(天政臺) 등 이른바 부여의 사영(四詠)을 유람한 것이다.
작자는 이 글에서 부여 사영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 사실 등을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낙화암과 백제의 궁녀, 조룡대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등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글을 지은 이유를 또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가향(家鄕)인 한산(韓山)과 부여는 60리밖에 안 떨어져 있어 여러 번 지나쳤지만, 이번에 처음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일을 크게 벌리려 하지 않는 편인데도, 농사철을 당하여 100여 인이나 동원이 되었고, 왕복 3일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니 일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떻겠느냐고 이를 경계하기 위해 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곧,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하는 관광의 폐해를 지적한 글이다. 사대부의 관광유람과 그것에 따른 감정의 기록, 문인의 눈에 비친 경물의 형상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유람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자기반성을 살필 수 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