멥쌀과 대응되는 말로 나미(糯米) 또는 점미(黏米)라고도 한다. 벼는 중국의 윈난지방(雲南地方)에서 인도의 아삼지방에 걸치는 고원지대가 원산지이다. 야생종에서 자포니카형(Japonica形, 粳)과 인디카형(Indica形, 籼)으로 나누어진다.
야생종에서 먼저 인디카형이 생겼다. 이것이 온도가 비교적 낮은 지역에서 자포니카형으로 바뀐 것이다. 100년경의 ≪설문해자 說文解字≫에서는 벼 가운데서 가장 찰기가 많은 것은 나(糯), 다음은 갱(粳), 찰기가 없는 것은 선(籼)으로 분류하고 있어 찰벼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유명한 벼학자 팅잉(丁穎)은 찰기가 있는 메벼가 중국 고대의 황하유역에서 재배되고 있었으며, 후한 초기에 이르러 더욱 찰기가 많은 찰벼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본의 하야시(林巳奈夫)는 도(稻)라는 글자가 한나라 때에는 찰벼를 가리키는 글자였으며, 메벼는 갱(粳, 秔)으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들 메벼를 가리키는 글자는 진나라 때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벼의 1차전파는 찰벼이고, 메벼는 후한에서 수나라 사이에 널리 먹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에 벼가 들어온 시기는 청동기시대이다. 이때에 들어온 벼의 품종이 어떠한 종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벼를 찧어서 쌀로 밥을 지을 때 찹쌀은 시루에 찌고, 멥쌀은 주로 쇠솥을 이용하여 짓는다.
찹쌀에 물을 붓고 가열하면 솥 밑바닥 부분의 찹쌀이 풀처럼 변하여 밑바닥에 달라붙게 되므로 대류가 그치게 되어 바닥은 눌어붙고 윗부분은 설익게 된다. 그러나 수증기로 찌면 낟알 사이로 수증기가 스며나와서 골고루 익게 된다. 이 문제는 찹쌀이 먼저인가 멥쌀이 먼저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의 앙소문화유적에는 시루와 토기솥이 아울러 나온다. 우리 나라에는 청동기시대에 벼가 들어왔고 시루도 이 시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따라서, 시루가 먼저 출토되었으니 쌀도 찹쌀이 먼저 들어왔을 것이라는 주장과,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토기를 이용하여 밥을 지었던 예를 들어 멥쌀이 먼저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설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어 단정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밥을 짓는 멥쌀은 배유가 반투명하지만 찹쌀은 대부분 희고 불투명하다. 이것으로 대개 구별할 수 있다. 밥을 지어보면 찹쌀이 멥쌀보다 찰기가 훨씬 많으므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찰기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찹쌀의 녹말이 아밀로펙틴(amylopectin)만으로 이루어지고 멥쌀은 아밀로스(amylose) 20%, 아밀로펙틴 80%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요오드반응에는 멥쌀이 청자색을 띠고 찹쌀은 적색을 띤다.
쌀 이외에 차·메의 차이가 생기는 곡물로는 조·기장 등이 있다. 율무는 재배종은 모두 찰기가 있으나 야생종인 염주는 메질뿐이다.
밀·호밀·귀리에는 차·메의 구별이 없고, 신대륙이 원산지인 옥수수는 아시아에 건너와서 중국 남쪽의 산지에서 찰옥수수가 육성되었다. 곡물의 차·메의 구별이 생긴 것은 동아시아의 난온대에서이다.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 때 쇠솥이 보급되고 또 ≪삼국유사≫에서는 까마귀에게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평상시의 밥은 멥쌀밥이고, 행사가 있을 때에는 찰밥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시루에 찐 찰밥은 떡의 형태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유리왕과 석탈해가 서로 왕위를 미루다가 마침내 떡을 깨물어 여기에 나타나는 잇자국으로 이빨의 수를 헤아려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는 고사는 찐 찹쌀을 떡메로 쳐서 만든 절편·가래떡의 존재를 시사하여준다.
찹쌀을 쪄서 낟알형태 그대로 먹거나 떡메로 쳐서 떡을 만들어 먹는다. 다르게는 찹쌀을 물에 담가 연하여지면 찧어서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쪄서 먹기도 하였다.
이 때에 찹쌀 이외에 멥쌀을 쓰는 경우와 두 가지를 섞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삼국시대 초기로서 중국 남방의 영향을 받아 밀로 떡·과자를 만든 것보다 앞선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 전하여져서 ‘시토기’라는 이름으로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