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한준겸은 1579년(선조 12) 생원이 되어 1592년에는 예조정랑, 원주 목사를 지내고 1605년에 호조판서가 된 인물로,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호를 부탁 받은 유교(遺敎) 7신의 한 사람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서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謚號)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원래 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와 함께 원주 음지촌(陰地村) 선영에 있었다. 그러나 산세가 좋지 않아 자손이 적을 것이라는 지사의 말에 따라 사위인 인조(仁祖)가 현재의 자리를 하사하여 천장(遷葬)하였다. 신도비의 비문은 2년 뒤인 1629년 우의정 이정구(李廷龜)가 지어 세웠다.
그러나 당시 효종(孝宗)이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세자가 되기 이전으로 어휘(御諱)가 현각(顯刻)되어 있어 이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효종이 이를 알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내탕금을 내어 이를 보수하였다. 묘역은 문익공을 비롯하여 좌윤공, 판관공, 생원공 등의 묘가 있다.
문익공 묘는 중앙에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그 좌우에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귀부(龜趺)에 푸른 대리석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생동감 넘치는 이수(螭首)를 얹었다.
귀부는 3.9×2.4m, 비신은 높이 255cm, 너비 112cm 두께 37cm이고, 이수는 높이 70cm, 폭 142cm 두께 67cm이다. 신도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연안도호부사 오준(吳竣)이 썼으며 이조판서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하였다.
신도비각은 상량문에 의하면 1769년(영조 45)에 세워졌는데 1891년(고종 28)에 훼철되었다. 비 주위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신도비각을 세웠던 크기가 다른 장초석(長礎石)이 세워져 있었으나 서해안고속도로가 건설되며 묘역 중앙을 지나게 되자 신도비를 묘역 옆으로 옮기고 새로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