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심 ()

최병심 영정
최병심 영정
유교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항일활동 역사서인 조희제의 『염재야록』에 서문을 작성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의 통치에 저항한 학자 · 독립운동가.
이칭
경존(敬存)
금재(欽齋)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4년(고종 11)
사망 연도
1957년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전라북도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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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항일활동 역사서인 조희제의 『염재야록』에 서문을 작성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의 통치에 저항한 학자 · 독립운동가.
개설

전주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존(敬存), 호는 금재(欽齋). 아버지는 최우홍(崔宇洪)이며, 어머니는 이천서씨(利川徐氏)로 서학문(徐鶴聞)의 딸이다. 이병우(李炳宇)·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4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17년 왜정(倭政)이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한다고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으나,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토지 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사적인 단식 투쟁으로 대결하였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학문세계와 사상

최병심은 사람이 음양·흑백을 분별할 줄 모르면 소인·난적이 되기 쉽다고 전제하고, 같은 계열의 학파라도 학문의 진리에 어긋나는 논설은 가차 없이 엄격하게 분석 비판하여, 태극(太極)·심성(心性)·이기(理氣)·의리론(義理論) 등 많은 잡저를 저술하였다.

천하의 지극히 높은 것이 성(性)이요, 백체의 가장 영묘한 것은 심(心)이나, 심은 때로는 욕망에 흐르기 쉬움을 경계해야 하므로, 성을 높여 도(道)를 스승으로 삼고 성경(誠敬)으로 심을 조절하면, 성과 심이 일치되어 사람이 곧 천리(天理)에 부합된다고 강조하였다.

맹목적인 학파의 추종에서 벗어나 성리의 근원에서 진리를 추구해, 성품을 높이고 마음을 낮춘다[性尊心卑]는 것과 성품이 스승이라면 마음은 제자다[性師心弟]라는 주장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저서로는 『흠재문집(欽齋文集)』 30권 14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전주의 옥동사(玉洞祠)에 봉향되었다.

참고문헌

『금재문집(欽齋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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