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해광(海光). 대구 출생. 1914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였다.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8년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3·1운동을 맞이하여 수립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파견되어 군무국장(軍務局長)에 취임하였다.
군자금모금차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잡혀 1919년 10월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金佐鎭)장군 휘하 지대장으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의용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 북경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1922년 10월 귀국하여 국외로 무기수송을 비롯한 구국항쟁과 군자금모금에 나섰다가 이듬해 7월 3일경상북도 칠곡 송림사 근처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이듬해 11월 대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광복 이후 1948년 5·10총선거 때 대구 갑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당선, 국회 외무·국방분과 위원장으로 국군조직법 정비를 비롯한 건군작업에 기여하였고, 공비토벌작전을 주도하였다. 6·25 때 육군중장으로서 유격대사령관으로 전투에 진력하였다.
1957년에는 김준연(金俊淵)과 통일당(統一黨)을 창당하여 부당수를 거쳐 자유당 말기 간부, 그리고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공화당에 관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