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금암(錦巖). 경상남도 남해 출생.
1943년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를 마치고, 6.25전쟁 당시 대구지역 사수 공훈으로 태극무공훈장·을지무공훈장 등 23개 훈장을 수여받았다. 1950년 이후부터 내무부 치안국 보안과장과 경무과장으로 7년 재직하는 동안 1954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행정과를 수료하였으며, 1956년 서울특별시 경찰국장을 거쳐 1958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비서관으로 있었다.
1960년 4·19혁명 바로 전에 제5대 공보처장으로 발탁되어 5·16군사정변 때까지 1년 1개월간 집무하는 동안 자유당 이승만 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를 지켜보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제5대 민의원선거 때 고향인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조선일보 상담역으로 언론계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70년 경우회(警友會)를 맡아 『경우신보』 회장이 되었고, 속기협회 회장으로 기자 육성에 주력하였으며, 이듬해부터 1974년까지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언론계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1972년 국제신문협회(IPI)회원과 신문협회 부회장을 거쳐 다음해 신문연구소 이사에 추대되었다. 제5·6·7대 및 제10·12대 국회의원으로 5선의원이 되었는데, 1965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으로 원내부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112전화 신고제도 창설과 남해대교 건설을 평소의 보람 있는 업적으로 기렸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7년 국회건설분과 위원장으로 의정활동에 기여하였다.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은성훈장 · 미국대통령공로표창을 받았고, 저서로 『유격전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