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박씨(朴氏). 속명은 정걸(定杰). 함경남도 함흥 출신. 함흥보통학교·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3·1운동에 참여하여 수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일본에 건너가 다이쇼불교대학(大正佛敎大學)에서 수학하였고, 2년 후 귀국하여 함흥에 해동불교청년회(海東佛敎靑年會)를 조직,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설봉산 귀주사(歸州寺)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 뒤 능인학원(能仁學院)을 창설하였으며, 함흥일능사립학교(咸興一能私立學校)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아동교육에 전념하였다. 1927년 함흥사립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고, 건봉사(乾鳳寺)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이수하였다. 그 때 한용운(韓龍雲)과 연락을 취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중 충청남도 부여에서 투옥되었으며, 출감하자 청양(靑陽)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함흥에 공회당(公會堂)을 건립하였고, 서울에 민립대학(民立大學)을 설립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관권(官權)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1931년 병으로 요양하다가 1936년 회복, 이듬해에 삼각산 약사사(藥師寺:지금의 奉國寺)에 다시 입산하여 용맹정진하였으며, 일승선사(日昇禪師) 밑에서 득도하였다. 1938년 약사사 주지로 있으면서 방대한 저서인 『투병과 인생』을 집필하였다.
1946년적조암(寂照庵) 주지가 되어 중창불사(重創佛事)와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하여 영도의 법화사(法華寺), 좌천동의 연등사(燃燈寺) 등지에 있으면서 포교사 생활을 하였다. 1953년 범어사(梵魚寺)에서 수좌(首座)를 상대로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설법을 시작하여 정화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적조암 주지로 있으면서 계속 정화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뒤 조계종 총무원 초대 교무부장, 금산사(金山寺) 주지, 전등사(傳燈寺) 주지, 『불교신문』 초대 주간, 법주사 주지, 중앙종회 부의장, 총무원 법규위원, 감찰원 감찰위원, 총무원 교육위원, 총무원 기획위원회 지도위원, 신흥사(神興寺) 주지, 소요산 자재암(自在庵) 주지, 조계종 원로회 원로 등을 역임하였다. 자재암에서 나이 80세, 법랍 4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 『투병과 인생』·『모순(矛盾)의 합리성(合理性)』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