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은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었다. 이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71년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 주관 하에 서울대학교와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고인돌[支石墓] · 돌널무덤[石棺墓]을 비롯해 민무늬토기시대[無文土器時代]의 네모움집터[方形竪穴住居址]와 빗살무늬토기시대[櫛文土器時代]의 돌깐집터[敷石住居址] 등이 확인되었다.
돌깐집터는 동서 길이 12.3m, 남북 너비 4m의 타원형으로, 내부에는 황갈색 사질토 위에 돌이 깔려 있었는데, 일부는 깎여 나가거나 교란되어 있었다. 깐돌을 들어낸 내부에서 화덕[爐址] 흔적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충청남도 서산 해미, 경상남도 웅천 자마산, 평안남도 대동군 청호리 등지에서 발견된 돌깐집터와 같은 유형으로 생각된다. 이 움집터의 주위에서는 약 11개의 노천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깐돌 사이사이와 화덕자리 주위에서는 사교집선문(斜交集線文) · 종주생선뼈무늬[縱走魚骨文] · 마름모무늬[菱形文] · 구멍무늬[有孔列文] 등의 문양을 가진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연대는 문양이나 바탕흙[胎土]으로 보아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돌깐움집터 근처에서는 민무늬토기시대의 움집터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남북 길이 3.1m, 동서 너비 2.65m, 깊이 40㎝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네모형태를 나타낸다. 유물은 간돌살촉[磨製石鏃] 5점, 숫돌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움집에서 채집된 서까래형태의 목탄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서기전 340·980·640년의 서로 다른 3가지 절대연대가 나왔다. 경기도 파주군 옥석리와 교하리 등의 움집들과 비교해볼 때, 이 움집의 연대는 서기전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빗살무늬토기시대의 돌깐움집터와 민무늬토기시대의 네모형 움집터간의 문화교체시기는 대략 서기전 10세기 이전인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