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서(金光敍)묘의 재실이다. 김광서는 고려 말 학자 김구(金坵, 호는 止浦)의 후예로 고려 말에 고부군수를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형 세영(世英)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취성재라는 이름은 명종조의 문신 임억령(林億齡)이 부안김씨가 살고 있는 옹정리를 찾아서 “옹정에는 군자가 많은데 김문(金門)에는 덕성(德星)이 모였다.”라고 칭찬한 글의 ‘취덕성(聚德星)’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1819년(순조 19)에 세워진 것이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이 재실에서 사방의 선비들이 모여 들어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