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전(勤政殿)에서 문과가,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문과합격자는 갑과에 예문봉교(藝文奉敎) 나세찬(羅世纘), 을과에는 이조좌랑 임열(任說)과 이약해(李若海), 병과에는 부사정(副司正) 윤인서(尹仁恕), 학유(學諭) 이영현(李英賢) 등 9인으로 도합 12인이었고, 무과합격자는 장원이 김유담(金有談)이었으며, 그 밖에 전 현령(縣令) 김전(金澱), 권지봉사(權知奉事) 송순령(宋舜齡), 전 권지봉사 정세필(鄭世弼) 등 23인이었다.
이 때의 급제자는 모두 가직(加職), 가계(加階)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직자(罷職者)와 고과평정(考課評定)이 전최하등자(殿最下等者)도 재서용되는 특전을 받게 되었다.
이해에는 3월의 별시(別試), 9월의 별시가 실시되었으므로 특별시험은 조종(祖宗)의 양육지도(養育之道)이나 자주 실시하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것이 아니라 요행지심(僥倖之心)만 조장시키는 것이라 하여 사헌부의 적극적인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탁영시가 실시된 것은 현직관리들이 급제 후 학문이나 무술에 힘쓰지 않음을 막기 위한 중종의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뒤 1599년(선조 32) 예조에서 중시(重試)의 명칭을 탁영시로 하자고 건의하여 대신들의 의논이 있었으나 관철되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