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발을 주로 사용하는 전신운동으로, 신체를 강건하게 하고 심신수련을 통하여 인격을 도야하며, 기술단련으로 자신의 신체를 방어하는 호신의 무술이다.
태권도는 인간의 본능인 자기방어를 위한 자연발생적인 투기가 체계화된 것으로, 그 연원은 고대부족국가의 제천행사 때 행하여졌던 제천대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영고 · 동맹 · 무천 등 원시종교의식 때 따르는 체육활동에서 우리 선조들은 신체를 단련하는 행동을 하였고, 이것이 우리 고유의 무예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우리의 전통무술이 수박(手搏), 수박희(手搏戱), 택견 등인데, 예로부터 전승된 고유의 전통 무술을 계승 발전시켜 현대에 탄생한 것이 바로 태권도이다.
택견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국방 · 전투기능 향상을 위한 무예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무인의 필수무술이 되었으며, 나라를 지키는 무인청년단(武人靑年團)에서 수련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선배(仙輩, 先人)와 신라의 화랑(花郞)이다. 선배는 고구려 태조왕 때 창설된 무인단으로 국방기능의 강화를 위하여 택견(택건이)을 수련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택견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통구(通溝)지방의 무용총 벽화를 들 수 있는데, 그 현실과 주실 천장에도 택견의 겨루기 모습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한편, 신라에서는 국가발전을 위한 화랑도의 기본 무예로 택견이 수련되었는데, 당시의 택견모습을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동조(銅造)금강역사상의 공격과 방어자세를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는데, 국방과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택견의 무예적 가치가 인정되고 기술수준이 높아졌으며, 더욱 조직화되고 일반화되었다. 고려 의종 때 이의민(李義旼)이 수박(택견)을 잘하여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였다거나, 최충헌이 연회를 베풀고 중방(重房)의 힘센 자로 하여금 수박희를 시켜 이긴 자에게 교위(校尉)나 대정의 벼슬을 주었다든지, 변안열이 임견미 · 염흥방 등과의 경기에서 이겨 밀직부사(密直副事)에서 밀직사사(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써 관에서 수박희(택견)의 무예적 가치를 높이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승패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 스포츠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고려 초 · 중기를 통하여 발전하여온 택견은 말기에 이르러 화약이 발명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무재(武才) 또는 무예적 기능이 약화되면서 민속경기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에는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할 때 문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를 시켰으니 이는 무신을 위로하고자 함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문신과 무신이 수박희를 단체경기로 하였다는 의미이다. 또 충혜왕 때에는 왕이 상춘정 · 화비궁 등에 나가 군사들의 수박희경기를 관람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건국 초기에는 정치적 · 국방적 상황에 연유하여 다시 무예를 중시하게 되고 택견에 능한 사람들을 발탁하기 시작함에 따라 무예로서의 택견이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0년(태종 10) 1월에 “의흥부(義興府)에서 군사를 뽑는데 수박희를 시켜 세 사람을 이긴 사람을 방패군(防牌軍)을 시켰다”라고 하였으며, 이듬해 6월에도 수박희를 통하여 군사를 뽑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라에서 수박희를 통하여 군사를 뽑는다는 소문을 듣고 지방의 관노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잡힌 뒤에 문인들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무풍이 쇠퇴하여갔다.
임진왜란 · 병자호란 등 난리를 겪은 뒤 나라에서는 훈련도감을 두고 무예를 장려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 등을 시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무예교과서를 만들게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장려에 힘입어 택견이 되살아나 무예로서나 민속경기로서 활력을 찾기 시작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청도 은진현 작지(鵲旨)마을에서는 매년 백중날 부근에 충청 · 전라 양도의 사람들이 모여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당시 풍속화의 주제로 택견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국방의 양상이 달라지고 개화됨에 따라 무예라기보다는 민속경기 또는 민속놀이로서의 성격이 굳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택견이 민속경기의 성격을 가지면서 동족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적 스포츠로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보이자, 일제는 정책적으로 이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택견과 가라테가 비슷한 점을 들어 가라테라 칭하게 하였으며, 가라테의 형을 보급시켜 택견의 말살을 꾀하였다. 그러나 의식있는 사범들에 의하여 택견은 비밀리에 전승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택견은 계승되어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그 당시 일본 무술들이 보급되는 여세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택견 대신에 6·25전쟁 이후 전통무예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태권도가 널리 보급되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그 성격도 무예에 내포되어 있던 경기적 요소인 승부법(勝負法)이 확대되어 스포츠로서의 의미가 강하게 되었다. 특히, 1961년 9월 대한태권도협회가 창립된 이래 스포츠로서 경기화되었다.
1962년에는 대한체육회의 가맹단체로 승인되었고, 1963년에는 전국체육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1971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국기(國技)로 인정받았다. 현재 국내에 2,500여 개의 도장과 2만여 명의 사범, 그리고 50만 명의 유단자와 250만 명의 수련생이 있다.
1971년에는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예의규범을 제정하여 태권도인의 예의와 자세, 도장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항,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방문하였을 때의 복장과 용모 · 의식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다. 1972년에는 태권도중앙도장 겸 시합장으로서 ‘국기원’을 개원하였다.
1973년에는 서울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세계태권도연맹을 창설하였다. 제1회 대회에서는 우리나라가 단체전 · 개인전 모두를 석권하여 종합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뒤 제7회 대회까지 7연패를 하여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다음해인 1974년 10월에는 서울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한 이래 계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태권도의 국제통합단체인 세계태권도연맹이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에 가맹되었으며, 1976년에는 국제군인체육회(CISM)에서 태권도를 정식경기 종목으로 채택하였다. 1978년 6월에는 프리월드게임(Pre-World Game)을 서울에서 개최하여 전종목을 휩쓸었다. 1980년 7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는 태권도를 올림픽경기 종목으로 채택하였다.
1981년 7월 미국의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게임에서 우리나라는 태권도 부문에서 9개의 금메달을 따내어 종합 2위의 전적을 올렸다. 1981년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88년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의 시범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어 경기를 치루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회 경기종목으로 채택됨에 따라 태권도는 세계의 스포츠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83년 12월에는 제1회 국제대학태권도선수권대회와 제1회 국제태권도학술세미나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태권도발전에 기여하였다. 세계적 스포츠로서 우리 민족의 긍지를 느낄 수 있는 태권도는 현재 전세계 각 도장마다 태극기를 전면에 게양하여 예의를 표시하도록 하고, 수련생에게는 한국어 구령으로 지도함으로써 한국의 얼을 세계만방에 심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의 본부는 서울에 있으며, 가입회원국 수는 1998년 현재 154개국에 이르고 있다. 산하 회원국에 3,000여 명의 사범을 파견하고 있으며, 2,000만 명의 세계 각국 수련생을 지도함으로써 민간외교는 물론 국위선양에 이바지하고 있다. 태권도협회가 주최하는 대표적인 국내대회로는 대통령기쟁탈 전국단체대항태권도대회(중등 · 고등 · 대학 · 일반부) · 전국체육대회(고등 · 대학 · 일반부) · 전국대학태권도대회(개인전 · 단체전, 대학연맹 주최) · 어린이태권왕겨루기대회(초등학교태권도연맹 주최) · 주한외국인 및 여성태권도대회 등이 있다.
국제대회로는 올림픽대회 · 아시아경기대회 ·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 세계대학태권도선수권대회 등이 있다. 1998년 12월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남녀 12체급 중 11체급에서 우승하여 우리나라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2위의 종합성적을 획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의 태권도 수련방법은 기본동작으로부터 품새 · 겨루기 · 단련 · 호신술 등으로 구별한다. 기본동작은 태권도기술의 근간을 이루는 손과 발을 이용한 역학적 요소를 지닌 기술로, 주먹과 손날을 이용한 막기 · 지르기 · 찌르기 · 치기와 발을 이용한 차기 기술이 있다. 품새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여 연무선에 따라 공격과 방어의 동작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숙달시켜 민첩성 · 근력 · 유연성 및 중심의 이동, 그리고 호흡조절 및 동작의 완급 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의 종류로는 유급자의 품새로 태극 1∼8장, 팔괘 1∼8장이 있고, 유단자의 품새로 고려(高麗) · 금강(金剛) · 태백(太白) · 평원(平原) · 십진(十進) · 지태(地跆) · 천권(天拳) · 한수(漢水) · 일여(一如) 등이 있다. 겨루기는 품새의 실제를 응용하여 실전에 임하는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전개하는 것으로서, 맞추어겨루기와 겨루기의 두 종류로 구분한다.
맞추어겨루기는 서로 주어진 공격과 방어를 맞추어 연습하는 겨루기이며, 겨루기는 자유자재로 실전에 임한 자세로 상대의 급소를 겨누고 방어하는 기술을 숙달시켜 감투정신과 용기를 북돋워준다. 단련은 손과 발 등의 공격 및 방어의 부위를 각종 보조기구를 통하여 강화, 단련함으로써 파괴력을 기르는 것이다.
호신술은 접근전에서 시도하는 상대방의 공격을 제압하고 역공격을 연마하는 기술이다. 경기는 체급별로 진행하는데 각 체급은 핀급 · 플라이급 · 밴텀급 · 페더급 · 라이트급 · 웰터급 · 미들급 · 헤비급으로 되어 있으며, 초등학교부 · 중학교부 · 고등학교부 · 여자부 · 대학부 · 일반부로 나누어진다. 경기시간은 3분 3회전이며(단, 여자부와 어린이부는 2분 또는 1분 30초로 단축될 수 있다), 휴식시간은 각 회 사이 1분이다.
경기장은 탄력성 있는 매트로 된 수평면 위에 사방 8m의 정사각형으로 한다. 경기자의 안전을 위하여 도복 위에 몸통 · 낭심 · 팔 · 다리에 보호대를 착용한다. 심판원은 감독관 1명, 주심 1명, 부심 4명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