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뒤 단장 조인관(趙仁官)을 비롯하여 정삼승(鄭森承)·김동준(金東俊) 등이 장백현(長白縣)·임강현(臨江縣)을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단원은 조인관·정삼승·김동준·최승호(崔承浩)·주택룡(朱澤龍)·김병륜(金炳倫)·임석우(林錫禹)·한원갑(韓元甲)·원성주(元成柱)·박대성(朴大成)·김계필(金啓弼)·한병수(韓炳洙) 등이며, 총단원수는 2,000여명에 이르렀다. 의용대를 편성하여 국내로 입국시켜 일제에 대한 항쟁을 전개하면서 각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다.
1921년 8월 20여 명의 단원들이 후창군 강변에서 후창경찰대와 격전을 전개하여 지단장 한병수 등 6명의 단원이 전사하였으며, 특무조장 김계필 등의 1대는 장진군 산악지대에서 적의 경찰대와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를 벌여 적을 섬멸하였다. 같은 해 9월 의용대 1대가 신흥군 신령(新嶺)에서 3명을 사살하였다.
1921년 6월부터 장백현을 근거로 활약하던 군비단·광복단·흥업단(興業團)·대진단(大震團) 등 무장단체의 합동작전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단체와 연합하여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 총단의 이창운(李昌云)은 연합회의 사찰이라는 직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뒤 이 연합회는 1921년 10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재편되었고, 1922년 4월 광정단(匡正團)으로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