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농업대학(東京農業大學)에 재학 중이던 평안도 출신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민족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37년 9월에서 10월 사이 김두혁(金斗爀)·김태훈(金泰薰)·김운하(金雲夏)를 발기인으로 농민계몽운동에서 출발, 민족독립운동으로 나아간다는 목표 아래 동지 21명을 포섭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결사적 조직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일정한 단체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 강령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목적과 방향은 뚜렷이 하였다. ①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 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하게 하여 독립을 도(圖)하며, 국내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조선 고유의 문화를 뚜렷이 나타내고, 세계 문화와의 교류로써 조선 민족의 행복을 증진할 것,
② 조선 민족의 의식을 앙양시키며 민족 대동단결에 의한 조선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것, ③ 농민계몽운동에 중점을 두고 실천을 제일로 한 방법으로서는 기설(旣設) 교육기관에 들어가거나 또는 계몽기관을 창설하여 교육 훈련에 힘쓸 것, ④ 각종 차별 문제를 들어 민족 대중의 불평불만을 터트려서 민족의식 앙양에 힘쓸 것, ⑤ 동화정책을 배격하고 관청에 취직하지 않도록 선전할 것, ⑥ 송산고등농사학원을 독립운동본부로 할 것 등이었다.
1938년 10월 동경 시내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릿쿄대학(立敎大學)·주오대학(中央大學)·호세이대학(法政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 등의 조선인 학우회와 손잡고 동지적 결합에 힘쓰는 한편 13명의 평안북도 출신 동경유학생으로 박천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보성중학교 출신 학생으로 보성동지간친회를 조직하였으며, 80여 명의 농대생으로 계우회(鷄友會)를 조직해 그 외곽 단체로 삼았다. 본거지는 본국의 송산고등농사학원에 두었으나, 1938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활동하던 김두혁이 1940년 2월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자 활동이 침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