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본. 『월헌집(月軒集)』 권5에 실려 있다. ‘포절군’은 절의를 품은 군자라는 의미로 대나무를 의인화한 이름이다. 딴 이름으로 죽존자(竹尊子)·관자허(管子虛)·차군(此君) 등이 있다.
「포절군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절군은 기주(鄿州 : 원문은 ○州)출신이다. 선조 황(篁 : 대숲)이 해곡(嶰谷)에 은거하다가 황제의 눈에 띄어 전악(典樂)이 되었다. 그의 자손으로 위천(渭川)의 적적(籊籊)과 수양(首陽)의 고죽군(孤竹君)이 있다. 포절군은 고죽군의 후예이다.
포절군은 지기가 없음을 한탄하고 조래(徂徠)로 옮겨 십팔공(十八公 : 소나무)과 함께 방외(方外)의 벗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기욱(淇奧)의 승경을 보고 거기서 머물렀다. 그리고 위(衛)에 공이 있어 벼슬하였다(詩經 衛風 淇奧章을 변용). 포절군은 진(晋)나라의 죽림칠현이 찾아와 술에 취하여 무례히 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라의 중신들이 술에 취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음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나서 황주(黃州) 석가산(石假山)에 은둔하였다.
포절군은 흑제(黑帝 : 겨울)와 동군(東君 : 봄)이 때를 다툴 때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이를 본 소식(蘇軾)이 제(帝)에게 상주하여 포절군이라는 작호를 내리기를 권하였다. 임금이 포절군에게 소상(瀟湘)을 주어 탕목읍(湯沐邑)을 삼게 하였다.
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이 법을 고친 뒤에 그는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같은 병을 얻어 조갈증으로 죽었다. 자손으로 차군이 있다. 「포절군전」의 서술자는 사평(史評)에서 포절군을 열장부(烈丈夫)라 일러 포절군의 정신이 자손에게 끼쳐 차군에 봉해졌으니, 향명(香名)이 천지와 함께 남을 것이라고 예찬하였다.
「포절군전」은 포절군의 선계(先系)의 이야기와 본전(本傳)인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전형적 전기형식이다. 이야기의 생동감이 없이 예찬으로 일관되어 있다. 포절군이 죽림칠현의 행동을 비판하고, 소식이 포절군의 절의를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군으로 봉해야 한다는 상주 등에서, 작자 정수강의 사상적 근거와 현실인식의 태도를 볼 수 있다.
작자는 유가적 사상을 기저로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정변과 사화로 인한 포폄(褒貶 :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이 불공평하였던 관료사회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