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제주도의 두 곳에 있었는데 서울에는 따로 제단을 만들지 않고 마보단(馬步壇)에서 지냈다. 제례는 소사(小祀)로, 가을에 곡식에 충재(蟲災)가 들 무렵 날을 가려서 지냈다.
각 지방에서 충재가 발생하였을 때 예조에 보고하면 향·축·폐백을 보내어 지방의 중심부에 단을 모아서 치제하게도 하였다. 행사는 다른 제사들과 같이 재계(齋戒)·전향축(傳香祝)·성생기(省牲器)·행례 등으로 시행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1709년(숙종 35) 6월에 경산(京山)에서 포제를 지냈고 1768년(영조 44) 호남지방에 충재가 들어서 포제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며, 개성 및 황해·평안·강원·함경·충청·전라·경상의 8도에 포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1773년 경상감사의 장계에 따라 고성 등 8읍에서 포제를 지냈으며, 1782년(정조 6) 7월황해도의 문화 등 9개의 고을, 경상도의 합천 등 21개의 고을과 전라도의 나주 등 22개의 고을에 충재가 들어 포제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경기도의 고양 등 8읍에는 충재가 들었으나 포제를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백을 문책한 일도 있다.
당시에는 충재가 발생하는 것도 모두 신의 조화라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였다. 이 밖에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정월 첫 정일(丁日)에 포제동산에 제단을 베풀고 유교식으로 풍년을 비는 포제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