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책. 한문 필사본. 지은이가 1770년 12월 25일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제주도를 출발하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유구열도(琉球列島)에 도착한 뒤, 갖은 고생 끝에 이듬해 5월 초 귀향하고 감회가 깊어서 이 글을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부터 양지도의(養志道義)에 뜻을 두고 웅지를 키우다가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대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장삿배를 일행 29명이 타고 제주항을 떠났다. 그러나 노어도(鷺魚島) 앞바다에 이르러 심한 비바람을 만나 3일간을 표류하다가 12월 28일 유구의 무인도에 도착하였다.
설날에 10여 명의 왜구들을 만나 값진 물건들을 빼앗기고, 1월 2일 안남(安南)에서 일본으로 가는 두 척의 상선을 만나 구조되었다. 1월 5일 일본으로 향하는 안남 상선에서 한라산을 보고 구조된 일행들이 환호하다가, 안남 사람들에게 탐라인(耽羅人)임이 밝혀져 해를 당할 뻔 한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의 도움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풀려났다.
1월 6일에는 흑산도(黑山島) 앞바다에 이르렀으나 다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청산도(靑山島)에 도착하였다. 어두운 밤중에 상륙하다가 29명 중 21명이 죽고, 8명만이 살아남았다.
7일에는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내고, 지은이는 꿈속에서 본 노파를 청산도에서 만나 그 노파의 주선으로 연리지(連理枝: 화목한 부부의 관계)를 맺었다.
13일 서울로 가고자 일행과 배를 타고 지도(智島)를 거쳐 15일에 강진(康津)에 이르자, 마침 제주도민을 만난다. 일행 중 7인은 제주도로 보내고, 지은이는 다른 1인과 새 일행이 되어 2월 3일 서울에 도착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3월 3일 서울을 떠나 5월 8일에 귀향하여 일가친척들을 만났다.
지은이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에는 먼저 귀향한 7명 중 4명이 죽고, 1명은 한라산 너머 남쪽에 멀리 떨어져 있고, 2명은 병중이라서 감회를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학계에 보고된 표해기(漂海記) 가운데에서는 가장 문학성이 높은 값진 해양 문학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