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 납치사건 (Pueb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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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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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내용

푸에블로호는 이날 1월 23일 1시 45분에 동경 127°54′3″, 북위 39°25′ 공해상에서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출동한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함장 중령을 비롯한 6명의 해군장교와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한 총 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는 이 날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도전을 받았으며, 이 날 하오 2시 32분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 보고를 보내 왔다.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해군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방성에 의하면,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수집보조함으로, 중량 106t, 길이 54m, 너비 10m, 시속 12.2노트에 구경 50㎜ 기관포 2문을 갖추었을 뿐인 비무장 함정이었다.

납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첫 추적을 받은 푸에블로호는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국적을 밝혀라.”라는 요구에 미국함이라고 답변하고 북한정이 다시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요구에 “공해상에 있다.”는 답변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약 1시간 뒤 북한정의 연락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출동해 왔다. 미그기가 우현을 선회 비행하며 위협 신호를 보내고 있는 동안, 이 날 하오 1시 40분 북한 무장 수병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여 곧 원산행을 강요하였다.

2시 10분 푸에블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고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보고를 해왔으며, 2시 32분 엔진이 꺼져 무전을 끊는다는 마지막 통신을 보내 왔다.

미국 정부는 즉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극동 주둔 제5공군에 비상출격 대기령을 내리는 한편,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항 근해로 보내는 등 강경조처를 강구하였다.

공해상의 납치 행위를 규탄하는 세계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사건 다음날인 이 달 24일 11시 판문점에서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렸다.

1·21사태가 있은 지 3일째에 열리는 이날 회담에서 유엔군측 소장은 북한 무장 유격대의 서울 침입을 신랄히 규탄하고 이어 푸에블로호는 북한 육지로부터 16마일 떨어진 동경 127°54′3″, 북위 39°25′공해상에서 납북되었다고 지적, “미국은 국제법상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승선원 전원과 푸에블로호의 즉각 송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북한측 박중국(朴重國)은 납북 지점은 동경 127°46′, 북위 39°17′으로 자기네 영역을 침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즉시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사건 해결을 위한 국제적십자사의 북한적십자사와의 접촉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 달 27일 미국은 폴란드에서 북한과의 간접 접촉을 시도한 데 이어 판문점에서 북한과 직접 비밀협상을 하게 되었다.

1968년 2월 2일 세번째 가진 비밀협상에서 미국이 영해 침입을 시인, 사과하는 조건으로 승무원을 송환한다는 조건에 합의했으나 북한은 승무원 석방에 따른 대가를 요구하였다.

사건 발생 후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28차례에 걸친 비밀협상 끝에 합의문서에 서명함으로써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게 되었다. 선체와 장비는 북한에 몰수되었으며, 보상금 지불에 관한 내역은 알려지지 않은 채 떳떳하지 못한 타결을 보았다는 후문을 남겨 놓았다.

참고문헌

『판문점』(김석영, 신문화사, 1972)
『북괴도발삼십년』(송효순, 북한연구소, 1978)
『역사의 현장』(한국신문편집기자협회, 1979)
집필자
김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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