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따라 ‘풍로(경상남도 창녕, 전라남도 보성)’·‘풀무’·‘풍차(風車)’로도 불린다. 『북학의』에는 ‘양선(颺扇)’으로, 『농정촬요(農政撮要)』에는 ‘풍선차(風扇車)’로 표기되었다.
나무로 만든 둥근 통 안에 여러 개의 날개가 달린 축을 장치하고 밖에서 이것을 돌리면 큰 바람이 나도록 만들었다. 위에는 곡식을 흘려 넣는 아가리가 따로 있으며, 축을 돌리면서 곡식을 부으면 겉껍질이나 검부러기들은 바람에 날려 옆으로 빠져나가고 낟알만 아래로 떨어진다.
바람을 일으켜 보리를 비롯하여 콩·팥, 밀에 섞인 겨, 먼지·쭉정이 따위를 가려내는 데에 쓰인다. 한 가마니의 쌀을 내리려면 3분쯤 걸린다. 풍구는 18세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지 않은듯하다.
박지원(朴趾源)은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 부뚜의 불합리성을 설명한 끝에 “내가 경상도에서 고을살이를 할 때 풍구를 만들어 시험해보았더니, 어린아이 하나가 이에 기대서서 발판을 약간 밟아도 100섬이나 되는 낟알을 하루에 다 부칠 수 있었다.”고 주장하여 중국의 농가에는 이것이 집집마다 있으나, 우리는 이의 사용을 꺼린다고 개탄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발로 밟아 부채를 움직이는 풍구는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