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이래로 고려·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를 짓는 능력은 선비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출세의 관건이었다. 사대부 남성들에게 시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만큼 시작에 얽힌 일화들도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에 얽힌 이야기, 이른바 시화(詩話)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는 매우 다양한데 그것들의 내용을 기준으로 대체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국가 민족의 대사를 에워싼 가지가지의 막후담, 관리나 정치인의 이면상(裏面相)과 그에 따른 일화 및 풍자, 학문과 학자를 중심으로 한 이문(異聞)과 기사(奇事)의 경위, 수려한 산천과 소박한 농촌에 마음이 향하는 지식인들의 정의(情意), 각계각층의 인물들의 고매한 인격과 진솔한 우정, 술과 여인에 얽힌 벌거벗은 인간의 자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매료되는 고담과 괴설(怪說) 등이다. 그 대표적인 예화는 다음과 같다.
시중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정지상(鄭知常)은 문장으로 한때 똑같이 명성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다투고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는 지상의 시에 “임궁(琳宮)에선 범어 끝나고 하늘색 깨끗하기 유리로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부식은 이 구절을 좋아해서 지상을 찾아서 그것을 자기의 시로 하려고 해보았으나 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뒤에 지상은 부식의 손에 죽어서 음귀가 되었다.
부식이 하루는 “버들색 천 줄기 푸르고 복숭아꽃 만점 붉다.”는 봄을 노래한 시를 읊었는데, 느닷없이 공중에서 정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고 “천 줄기 만점은 누가 세었느냐? 왜 ‘버들색 줄줄이 푸르고 복숭아꽃 점점이 붉다.’고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부식은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 뒤 어떤 절에서 우연히 변소에 올라갔는데, 정 귀신이 뒤에서 불알을 잡고 물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왜 얼굴이 붉으냐?” 부식은 천천히 말했다. “개울 건너 언덕의 단풍이 얼굴에 비쳐서 붉다.” 정 귀신은 불알을 죄어 쥐고 “불알 껍데기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식은 “네 아비 불알은 쇤 줄 아느냐?” 하고 안색을 변하지 않았다. 정 귀신은 불알을 더욱 세게 쥐어 부식은 마침내 변소에서 죽었다.
시작에 능한 관리들 사이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시를 지은 내력에 얽힌 이야기들도 무척 많다. 예를 들면 강희안(姜希顔)은 젊어서부터 재주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루원(楊州樓院)에 올라가 소시(小詩)를 세 편 지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산 있으면 어디인들 초막집 아니 되랴. 청산과 마주앉아 한숨 내뿜어 본다. 벼슬살이 십년이면 늙어 버리니 흰 귀밑머리 하고 귀거래 부르게 만들지 말아.”라고 읊었다. 영천군이정(李定)은 이 시를 보고 절을 하고 비평을 써서 붙였다.
“이 시는 핍진하니 서(徐)의 것이 아니면 이(李)의 것이다.” 그 때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시단의 명망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에게 감복되는 바 되었던 것이다. 그 뒤에 정이 다시 그 누 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때 먼저 써 붙인 비평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시에는 강산의 아취가 깃들여 있고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것으로 보아 결코 고정된 수법에 얽매어 버린 보통 선비가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또, 크나큰 천지 넓디넓은 강산에 어찌 인재가 없어 서 이를 밀어야 했는가? 이것은 인재를 따돌리고 사람들을 멸시함이 너무 심하지 않나?” 글을 보고 대단히 뉘우쳐 자기의 비평을 지워 버렸다.
시인들의 시품이 워낙 교묘하고 뛰어나다 보니, 자연 사람의 글이 아니라 귀신의 글이 아닐까 하는 감탄에서 귀신과의 교통이 이야기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김안로(金安老)가 젊었을 때에 관동 지방에 노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귀신이 나타나서 시를 읊어 주었다.
“우 임금 땅 산천 밖에 봄날은 무르녹고 순 임금 궁정의 새와 짐승 사이에선 음악이 연주되네.” 그러고는 “이것은 네가 벼슬길에 오를 글귀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깨어난 뒤에 곧 써 두었다.
이듬해에 정시(庭試)를 치르러 들어갔더니, 연산군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서 시험하였다. 그 가운데는 ‘봄날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침향정(沈香亭) 가에 앉아서 한가로이 악보를 펼쳐 본다’라는 제목도 있었는데 한(閑)자로 압운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귀신이 읊어 준 글귀를 생각해 보았는데, 제목의 뜻과 아주 잘 들어맞았으므로, 그대로 써서 내었다. 강목계(姜木溪)가 고관(考官)으로 있었는데, 크게 칭찬하면서 장원으로 뽑았다.
김안국(金安國)은 평소에 글을 잘 알아본다고 불렸는데, 마침 시관(試官)으로 끼어 있다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 구절은 귀신의 것이지, 사람이 지은 시가 아니다.” 곧 김안로를 불러 물었더니 그가 사실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김안국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구전 설화의 세계에서 보이는 풍월담들은 대체로 시화집 내지는 문헌 설화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구전 역시 인물 중심의 일화가 대부분이다.
구전자료에서 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김삿갓·최치원(崔致遠)·성삼문(成三問)·김안국·이색(李穡)·서경덕(徐敬德)·정철(鄭澈)·이산해(李山海) 등이고 구전 풍월담은 대체로 경쟁담의 성격을 지닌다.
즉, 주인공이 다른 상대, 구체적으로는 중국 선비나 승려 등과 누가 더 시를 잘 짓는가를 겨루는 글 시합을 벌이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직 학동 시절의 성삼문이 압록강(두만강)에서 뱃사공으로 가장하고 거만한 중국 사신의 콧대를 꺾어 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기왕의 글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의 글을 고쳐서 더 뛰어난 문장으로 만든 이야기를 한 편 예화로 들면, 김안국은 6세 때 “불밭에는 새벽별 떨어지고 쇠북소리는 늙은 용의 읊조리는 소리와 같다(烽火晨星落, 鐘聲老龍吟).”라는 시를 듣고, “봉화는 천리의 믿음이요, 쇠북소리엔 일만 사람이 행한다(烽火千里信, 鐘聲萬人行).”라고 고쳐 지어 일찍이 시재를 인정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구전 설화 풍월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김병연(金炳淵 : 별호는 김삿갓, 또는 金笠)이다.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인해, 세상을 비관하고 일생을 객지로 떠돌며 다양한 일화와 더불어 뛰어난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구전 풍월담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단연 김삿갓이다.
그런데 명석한 시재를 지닌 김삿갓도 간혹 자신보다 더 시를 잘 짓는 신동 혹은 여인네를 만나 당혹하기도 한다. 중국 사신을 혼내 준 소싯적의 성삼문, 그리고 김삿갓을 낭패하게 만드는 여인네의 이야기 등은 구전 자료가 비록 시화에서 파생된 풍월담이라 할지라도 권위의 허상을 파괴하는 민중들의 숨은 능력을 여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심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