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용어는 이식(李植)이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의 시집에 쓴 짧은 글(村隱劉希慶詩集小引)」에서 처음 사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발문에 의하면 유희경·백대붕(白大鵬) 등을 당시 사람들이 ‘풍월향도(風月香徒)’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향도란 서류(庶流)들이 만든 계(稧)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향도라는 용어가 조선시대에 ‘상여를 메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주로 사대부가 아닌 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동시에 유희경이 상례(喪禮)에 밝아 왕가나 사대부가의 치상(治喪)에 종사한 것을 지칭한 듯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풍월향도란 사대부가 아닌 서류·천인들이 풍월, 곧 시문을 즐기기 위하여 모인 시단이라는 뜻이 된다.
풍월향도의 우두머리격인 사람은 유희경이었다. 유희경은 원래 천인 출신으로 남언경(南彦經)에게서 수학하여 특히 상제(喪制)에 밝았다. 그래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에 반드시 불려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공 및 전쟁 중의 재정난 해결에 도움을 준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급(資級)을 받아 사대부 신분으로 상승하였던 것이다.
유희경이 만년에 은퇴하여 정업원(淨業院) 북쪽 계곡에 침류대(枕流臺)를 지었다. 백대붕(白大鵬)·박계강(朴繼姜)·최기남(崔奇男)·박지화(朴枝華)·강옥서(姜玉瑞)·박인수(朴仁壽)·권천동(權千同)·공억건(孔億建) 등 사대부가 아닌 서류·천인들과 시문을 창수하였다. 이들을 당시에 풍월향도라 불렀던 것이다.
풍월향도에는 당시 사대부로서 문명이 높았던 차천로(車天輅)·이수광(李睟光)·신흠(申欽)·전현성(全玄成)·홍경민(洪慶民)·임숙영(任叔英)·조우인(曺友仁)·성여학(成汝學)·박순(朴淳)·이식·이정구(李廷龜)·이달(李達)·장유(張維) 등도 참가하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의 정황이 『촌은집』 3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풍월향도 시인의 등장은 한국한문학사에 있어서 새로운 작자층의 출현을 의미한다. 곧 양반사대부들의 전유물이던 한시문(漢詩文)이 그 이하의 신분에까지 확대 보급된 것이다. 이 풍월향도라 불리던 일군의 시인들은 그 뒤에 올 낙사시사(洛社詩社)이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시인들처럼 뚜렷한 자기 신분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하여 모인 것은 아니나, 일단 뒤에 전개될 여항문학(閭巷文學)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