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한경(韓璟).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금주수(金州守)가 되었다. 금주는 항상 전부(田賦)가 정액(定額)에 미달하여 수령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이곳에 부임하여 둔전(屯田)을 경영, 곡식 2,000여 석을 얻어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 공적으로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제수되고 공부시랑 간의대부(工部侍郎諫議大夫)·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翰林學士)를 지냈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옮겼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 때 시무(時務)에 관하여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묘의 향사를 엄격히 할 것, 제사(諸司)의 시물(市物) 억매를 금할 것, 사체를 소중히 다룰 것, 살생을 금할 것, 사냥을 그치고 봉양을 절약하여 기갈을 진휼하게 할 것, 『법화경』을 숭상하고 독송할 것 등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