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한 북한공산군은 27일 저녁에는 전차를 앞세우고 서울 외곽을 압박하였으며, 28일 자정을 넘어서면서 국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던 청량리쪽으로 전차대의 일부를 빼돌려 새벽 2시경 홍릉일대를 뚫고 들어왔다.
또한, 문산과 파주쪽에서 밀고내려온 북한군은 수색 쪽으로 다가서면서 그 중 일부가 김포를 향하여 한강을 넘어올 채비를 갖추었다. 당시 육군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은 북한군의 전차가 시내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에게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명령한 다음, 시흥으로 향하였다.
그 전날인 27일 오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육군공병학교의 작업조는 28일 오전 2시 30분 경 공병감의 명령이 떨어지자 3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이 때 북한강파출소와 중지도에는 공병경계분대와 헌병대가 배치되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내려오던 수십대의 차량들이 대파되고 수많은 인파가 파편과 폭음 속에 사상(死傷)을 입는 가운데 폭파현장은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중 1개의 단선철교는 폭파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중에 북한군에 의하여 이용되기도 하였다. 서울 외곽을 지키기 위하여 남아 있던 국군의 주력부대와 수많은 시민들을 강북에 남겨둔 채 성급하게 한강교를 폭파하여 그 퇴로를 끊고 만 것은 우리의 전사(戰史)에 하나의 오점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하였다. 폭파 책임자 최창식은 1950년 9월 총살되었다. 12년 뒤인 1962년 재심이 이루어져 무죄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