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우(公佑), 호는 유하(柳下). 증조는 한광직(韓光稙), 할아버지는 한치구(韓致九)이며, 아버지는 한진호(韓鎭㦿)이다. 외할아버지는 정의준(丁義準)이다.
1835년(헌종 1) 별시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문관 관원으로 발탁되었다. 1840년 진위 겸 진향사행(陳慰兼進香使行)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완창군 이시인(完昌君 李時仁)·윤명규(尹命圭)를 수행하였다. 1854년(철종 5)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858년 순원왕후(純元王后: 趙大妃)의 인산(因山) 때 배종승지(陪從承旨)로 수행하여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다.
1861년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이듬해 경상좌도 암행어사 임승준(任承準)이 그가 전에 경주부윤 때 진공재감(進貢裁減)을 임의로 변경해 처분하였다고 서계(書啓)를 올려 죄를 받았다. 1864년(고종 1) 성균관대사성, 1865년 공조판서·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 1866년 예조판서·판의금부사, 1868년 이조판서·공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69년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 있을 때, 재해를 입은 백성의 구휼 문제와 도둑이 성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처방의 장계를 올린 기록이 보인다. 1872년 우의정에 이르렀는데, 1873년 전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이 소를 올려 대신들이 건백(建白)하지 않는 풍조를 논하고 국사(國事)를 걱정하자, 좌의정 강로(姜㳣)와 소를 올려 죄를 청하였다.
고종이 이미 최익현에게 죄를 주어 귀양보냈으니 스스로를 책망하지 말라고 이해시켰으나, 계속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좌의정 강로와 함께 최익현의 상소 내용이 지나치다며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같은 해 전장령 김영훈(金永薰)이 평안감사 재직시에 그가 부신(符信)을 소홀히 하였다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김제군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개월이 채 못 되어 특별히 방면되었으며, 1874년 다시 등용되었다.
1878년 대사헌 이인명(李寅命)에 의해 효휘전(孝徽殿)의 예척일(禮陟日)에 곡(哭)하지 않았다고 탄핵받아 다시 춘천부로 유배되었는데, 이 때 삼사(三司)에서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릴 것을 다섯 번이나 청하였으나 고종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5개월 뒤 왕세자의 병환이 나아진 것을 축하하는 진하사면(陳賀赦免)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사간원에서 한계원의 방면을 철회할 것을 극구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고, 다음해인 1879년 판부사(判府事)로 등용되었다. 1881년 이재선(李載先)의 역모사건을 사사로움에 치우쳐 제대로 밝히지 않고 성급히 마무리지었다고 다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왕이 한계원을 두둔하여 유서(諭書)를 내려 지나치게 인책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 고종이 상당히 신임하고 아꼈던 것 같다. 1882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