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세사회사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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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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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 이수건(1935~2006)이 후삼국으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토성(土姓)과 군현제에 관해 저술하여 1984년에 간행한 학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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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학자 이수건(1935~2006)이 후삼국으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토성(土姓)과 군현제에 관해 저술하여 1984년에 간행한 학술서.
내용

토성과 군현제를 사회사적인 시각에서 쓴 책이다. 1984년 일조각(一潮閣)에서 간행했다.

내용의 구성은 토성 문제, 후삼국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지배 세력과 토성과의 연관 관계, 그리고 조선 초기의 군현제 정비와 그 성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성 문제는 일찍부터 고려사회의 기층 문제 해명과 관련해 중요성이 인식되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저자에 의해서이다.

저자는 먼저 토성은 중국의 씨성(氏姓)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姓)의 출자(出自)를 표시한 본관(本貫 : 土=氏)과 부계 혈통을 뜻하는 성이 결합된 복합어임을 확인하고, 그 형성 과정·내부 구조·분포와 분화 과정 등에 관해 치밀한 분석·검토를 가했다.

이를 바탕으로 후삼국통일 이후인 940년(태조 23)경의 군현제 개편과 함께 이루어진 토성분정(土姓分定)이 신분제 재편성과 효율적인 지방 통치 체제의 확립에 취지가 있었음을 밝혔다.

또, 토성은 읍사(邑司)를 구성한 향촌의 지배 세력인 동시에 중앙관인(中央官人)의 공급원이었음과 사회의 변천에 따라 그들의 진출이 지역 및 계층별로 확산, 와해되어갔음을 명백히 했다.

다음으로 토성 집단이 와해된 이후인 조선 초기 지방 사회의 실태를 구명하고자 지방 제도 정비 과정에서의 임내(任內) 및 월경지(越境地)에 관한 최초의 고찰을 시도해, 향(鄕)·소(所)·부곡(部曲)의 천민 집단설에 대한 비판적 논리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상과 같은 저자의 견해는 연대기(年代記) 및 지지(地誌) 등 일반적인 자료의 활용 수준을 넘어서서, 금석문·문집·고문서·보첩(譜牒) 등의 광범위한 섭렵 및 실지 답사를 통해 얻어진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따라서 한국 중세사회의 이해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문제들은 저자 자신 뿐만 아니라,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유념해야 할 앞으로의 과제이다.

즉, 토성의 분정 시기, 내부 구조 및 그 존재 형태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요청되는 점, 중국식 씨성제 채택 이전 부명(部名)으로 표시된 족단(族團)과의 연관에 대한 검토가 결여된 채 한성(漢姓)의 일반화 과정에 서술이 치중된 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료 인식에서 김씨(金氏)·박씨(朴氏)를 신라의 종성(宗姓) 및 경주박씨(慶州朴氏)로 일관되게 비정한 점, 중국계 귀화인을 때로는 인정하고 때로는 부정한 점, 세계(世系) 파악에 있어서 후대의 윤색을 가끔 그대로 신빙한 점, 그리고 연구 대상이 지배 계층과 제도적 측면에만 치중된 점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세사회의 이해를 위해 새로운 시각을 설정하고 광범위한 새 자료를 발굴, 활용한 점과 10여 년에 걸쳐 쓰인 논문들을 일관성 있게 엮기 위해 구고(舊稿 : 과거에 썼던 글이나 원고)를 수정, 보완하거나 전면 개정한 저자의 학문적 자세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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