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기 시작한 이래, 교포자녀의 교육을 위한 자치기관의 필요성에 의하여 1906년 9월 2일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설립하였다.
처음의 학교명칭은 한인기숙학교(韓人寄宿學校, 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였는데, 이는 한국인 학생을 전원 기숙사에 입사시켜 전인민족교육(全人民族敎育)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감리사 와드만의 부인(Mame H. Wadman)이 교장이었고, 미국인 교사 3명과 한인교사 2명 그리고 기숙사 사감 이지성이 있었다. 학생 수는 65명이었고, 1907년 초 하와이정부가 '정규'학교로 인가하여 이 학교 졸업생은 다른 상급학교로 진학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에서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의 편의제공을 위하여 집단적 수용시설을 우선적으로 마련하였으며, 기숙사는 호놀룰루에 있는 한국인 감리교회의 희사헌금 등으로 마련하였다.
1913년 9월이승만(李承晩)이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의 명칭을 한인중앙학원(Korean CentralSchool)으로 개칭하고 학제를 미국식으로 개편, 고등과·소학과·국어과·한문과의 4개 학과로 편성하였다.
수업연한은 3년이고, 학과목은 국어·국사·지리·성경·유년필독(幼年必讀)·수신(修身)·초등소학독본·산술·한문·영어·중국어 등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를 강조해서 가르쳤으며, 한국근대사를 왜곡 서술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불식하고자 노력하였다.
멀리 하와이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를 통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을지문덕(乙支文德)·강감찬(姜邯贊)·이순신(李舜臣) 등의 위인·영웅의 전기를 가르침으로써 민족의 긍지를 일깨웠다. 또한 외국의 영웅이나 현제(賢帝)의 일생을 교육함으로써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승리와 영광의 역사의식을 일깨우기에 주력하였다.
한편 하와이로 이민 온 동포나 그 자제 가운데 연령관계로 인하여 소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청년들에게는 입학준비를 위한 속성과를 부설하여 진학준비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하였다. 전체 학생은 4개 학년으로 나뉘어 공부하였으며, 교과목은 영어는 물론 한국어와 한문이 포함되었다. 감리교선교부에서 경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 양성에 중점을 두어 성경을 가르쳤다.
이승만이 교장직을 맡은 이후, 한인중앙학원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승만은 당시로는 거의 혁명적인 남녀공학(男女共學)제도를 실시하였고, 자기 집에서 통학할 수 없는 많은 학생들을 위해 새 건물을 지어 기숙사로 쓰게 하였다. 또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미국인 교사를 따로 채용하여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승만과 미국 선교부 사이에는 교육방침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즉 미국사람은 한인학생들을 하와이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미국사람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에게 한국말ㆍ한국역사ㆍ한국관습을 가르쳐, 장차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를 원했다.
또한, 한인중앙학원 운영에 필요한 재정 문제로 이승만과 프라이 감리사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교육방침과 재정문제에 관한 상충된 견해가 이승만의 교장직 사임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913년 봄에 제1회 졸업생 30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은 각 교회에 소속되어 선교활동을 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학교는 하와이에서 우리 나라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킨 뜻깊은 교육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