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단오절의 단오굿에서 행해진다. 원래 한장군은 이 지역 단오굿의 중심행사인 여원무(女圓舞)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으로, 1969년 자인단오굿이 조사되고, 그해 가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여원무가 출연하여 이것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설상의 인명이 민속연희의 명칭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인고을의 전설에 의하면, 한장군은 신라 혹은 고려 때 사람이라 하는데, 언제인가 왜적이 이곳을 침범하여 도천산(到天山) 위에 웅거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자 그는 꾀를 써 여자로 가장한 뒤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관, 곧 여원화(女圓花)을 쓰고 산아래 버들못둑[柳堤]에서 광대들의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자 왜적들은 도천산에서 내려와 여원무의 신기함과 풍악의 흥겨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 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한장군은 여원화를 벗고 무서운 장군으로 돌변하였고 광대들도 모두 비수를 든 무사로 화하여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였다.
왜적은 하나하나 쓰러져 순식간에 못물은 핏빛으로 변하였는데, 지금도 못 둑에는 왜적을 벨 때 생긴 칼자국이 있는 바위가 남아 있어 마을에서는 이를 참왜석(斬倭石) 혹은 검흔석(劍痕石)이라 부른다. 그 뒤 이 고장에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기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거행하고 성대한 놀이를 베풀었다는 <한장군놀이>의 유래가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송수현(宋秀賢)이라는 현감이 새로 진충사를 지어, 한장군을 모시는 한묘(韓廟)가 두 개가 있었는데 이후로도 한장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정착되어 현재는 자인면 · 진량면 등지에 한당(韓堂)이 7개소나 된다.
이들 각 분사(分祠)에서는 정초에 대를 내려 제주를 선발한 뒤 단오굿을 주관하게 하고, 단오굿에 소용되는 비용은 동사(洞祠)가 있는 동을 제외한 경산군 7개면의 면민들이 각 가정에서 거두어 충당하였다.
이곳의 단오굿은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에 모였다가 가장행렬로 진장터 광장까지 와서 여원무를 상재하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린 후 다시 현사로 돌아와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한장군놀이>는 여원화를 쓰고 오색채의(五色彩衣)를 입은 한장군 남매를 앞세우고 민호장(民戶長)과 사또가 따르는 가장행렬을 이른다.
이 가장행렬은 규모가 대단하여 필요한 구성인원만도 장산사명기(獐山司命旗) · 청룡기 · 백호기 · 영기(令旗) 등을 든 사람들과 농악대, 여원화 2명, 무부(巫夫), 희광이, 여장동자 2명, 감사뚝, 군노 2명, 사령 2명, 포장(砲將), 포군 20명, 영장(營將), 기생전배(前陪) 4명, 중군(中軍), 삼재비(세민풍악), 전배통인(前陪通引), 일산(日傘) 및 파초선(芭蕉扇), 도원수, 인배통인(印陪通引), 수배(隨陪 : 讀祝官) 등이 있다.
특히 여원화는 높이가 10자나 되며 한장군 남매를 가장하여 오색 채의를 입혀 거대한 꽃귀신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 여원화에는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 하여 사방에서 몰려든 구경꾼들이 최후의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뜯어간다. 단오굿이 끝난 뒤에는 여흥을 돋우고자 말달리기 · 씨름 · 그네뛰기 등이 공연된다.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기예능 보유자로는 김도근(金道根 : 제관)이 있다.
한장군놀이는 2007년 3월 12일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