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죽선(合竹扇)의 기원은 사치 풍조가 생긴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정조 때는 합죽선뿐 아니라 대모(玳瑁)나 화각(華角)으로 변죽을 꾸몄으며, 길이는 한 자가 넘고 살의 수가 40~50개에 이르는 고급 부채가 유행했다. 정조 18년(1794)에 전라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서유문(徐有聞)이 접선(摺扇)의 병폐를 적시(摘示)하자, 좌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제시한 개선안에 합죽선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이를 통해 합죽선이 고급 부채의 수요가 늘고 접선을 치장하던 1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죽선의 제작지로는 전주가 첫손으로 꼽힌다. 전주와 남평을 부채 명산지로 꼽은 『동국세시기』에 모양과 쓸모에 따라 백선(白扇), 칠선(漆扇), 유선(油扇), 반죽선(斑竹扇) 등과 함께 합죽선이 기록되었다.
조선 전기부터 시작된 접선의 치장 관습은 사북을 금은으로 바꾸는 단계를 넘어 조선 후기에 대모나 화각, 옻칠 등으로 꾸민 별선으로 발전했고, 합죽선은 제작에 여러 단계의 공정과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고급 기술이어서 특히 제한된 특수층이나 중국에 보내는 진헌(進獻) 방물(方物)로 선호되었다.
선면(扇面)의 형태가 고정된 단선(團扇)과 달리 부챗살을 접어 지니기 쉽게 만든 부채를 접선(摺扇)이라 한다. 합죽선은 접선 중에서 변죽과 살대에 대껍질을 맞붙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합죽선을 제작하는 데는 6개의 공방(工房)이 각기 다른 공정을 맡아 협업하여 완성했다. 알맞은 대나무를 골라 다듬는 기초 공정은 초조방이 맡고, 대껍질을 부레풀로 맞붙여 살을 만드는 정련방, 변죽에 인두로 무늬를 그리는 낙죽방, 대나무를 매끄럽게 다듬고 광을 내는 광방, 살대에 선면을 접어 붙이는 도배방, 선면을 접고 펴도록 부채머리의 축이 되는 지점에 금속 고리를 박는 사복방이 서로 지근거리에서 긴밀하게 공조했다.
합죽선은 크게 대나무와 선면, 사북으로 구성되며, 대나무는 다시 변죽과 살대, 부채머리에 해당하는 군안이 있으며, 군안에 접한 변죽에 얇은 수침목을 대고 쇠뼈를 깎아 버선코 형태로 날렵하게 멋을 낸다. 사북은 부채머리를 관통하여 축(軸)의 구실을 하는 장식과 선추(扇錘)를 다는 고리로 구성된다. 선추는 관직을 가진 자에게 허용되었으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제한이 무색해졌다. 선추는 길상무늬를 새겨 장식한 것이 있으나 보통은 나침반이나 침통을 달아 응급용으로 사용했다.
합죽선은 부채의 선면을 그대로 두는 백선(白扇)이 기본이며, 선면에 좋아하는 시구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선면화로 운치 있게 꾸몄다. 일반 접선처럼 더위를 쫒고 햇볕을 가리는 기능 외에도, 양반 계층이 계절과 무관하게 지니던 애완물이었고, 판소리의 창자가 소품으로 쓰기도 했다.
합죽선의 품등은 근대 이전까지는 부챗살의 개수로 가늠했으나 현재는 부채의 변죽으로 덧댄 대뿌리의 촘촘한 마디 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다양한 형식의 별선이 대부분 사라진 근대 이후에도 합죽선의 인기는 여전하여 그 전통이 전주를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다. 합죽선의 전통 기술은 고(故) 이기동의 뒤를 이은 김동식, 엄재수, 박계호 등이 전주를 중심으로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