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군의 모체 구실을 하였다. 중국·독일에서 항해학을 익히고 귀국한 손원일(孫元一)과 일본에서 일등기관사로 활약하다가 귀국한 정긍모(鄭兢謨)가 중심이 되어 8월 21일서울의 안동교회(安洞敎會)에서 해사대를 결성하였다.
해사대는 해군요원의 양성을 위하여 첫 단계로 80여 명의 해양관계 경력대원을 선발하고, 9월초부터 해양기술교육과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교육은 항해기술에 손원일, 기관기술은 정긍모·한갑수(韓甲洙), 해양훈련은 김동준(金東俊), 영어교육은 윤치창(尹致昌) 등이 맡았다.
최초의 교육은 안동교회에서 시작하였으나 곧 청량리에 있던 구 전매청공장의 창고로 옮겨야 하였고, 해사대사무실은 서울 관훈동 소재 구 표훈전(表勳殿) 자리로 옮겼다. 해사대는 간부대원의 사재를 털어 발대가 된만큼 그 재정적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9월 초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관계를 끊고, 해사대의 순수한 발전을 다지기 위하여 구 교통국 해사과 산하단체였던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의 대표자인 석은태(石銀泰)와 합류할 것을 결정하고, 두 단체의 명칭을 조선해사협회로 바꾸는 동시에 해사대 본부를 서울 회현동 소재 조선해사보국단 사무실로 이전하였다.
이같은 창군합류에도 불구하고 심한 재정난이 겹쳐 한때는 해사대원 40여 명이 정긍모의 인솔하에 부산으로 향하여 귀국동포 수송지원사업에 뛰어들어야 하였다. 해사대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며 그 해 11월 미군정당국에서 인가한 해방병단(海防兵團)에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