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당(鄕黨)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향중(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거나 향사(鄕射 : 향원들이 서로 편을 갈라 활쏘기 재주를 겨루는 의식)·독법(讀法 : 향민을 모아 놓고 법령을 읽어 알리는 의식)을 하며 향안(鄕案)을 보관하고 삼향임(三鄕任 : 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근무하던 청사이다.
향사당(鄕社堂)·향서당(鄕序堂)·집헌당(執憲堂)·풍헌당(風憲堂)·향헌당(鄕憲堂)·회로당(會老堂) 등으로도 불렸다. 처음에는 유향소(留鄕所)로서 기능을 하였으나, 1475년(성종 6)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이라 개칭되었다.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 : 땅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고대 현군들은 몸소 인의(仁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하였다.
향사당은 처음에 관아에서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일향부로(一鄕父老)의 힘과 관아의 후원으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대체로 향부로들의 출자에 의하여 재건되면서 그 위치도 관아 구내로 이전되었다. 규모는 대개 5∼20칸 내외였고, 지방에 따라서는 주방까지 마련된 곳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