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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 건설한 사우디 쥬베일 산업항
현대가 건설한 사우디 쥬베일 산업항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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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설립된 종합건설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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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7년에 설립된 종합건설업체.
연원 및 변천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으로 출발하였다. 1947년 5월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은 기존에 운영하고 있던 현대자동차공업사 한 쪽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걸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건설업이 호황을 이루자 1950년 1월 10일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당시 미군 막사 공사를 맡으면서 전시에도 건설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미군 막사뿐만 아니라 미군이 발주하는 각종 토목공사를 수주하면서 시공 능력을 인정받았고, 휴전이 되고 나서는 그 경력을 토대로 낙동강 고령교와 한강의 인도교 등 전후복구공사를 수행하면서 국내 건설업체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5년 11월에는 현대상운주식회사를 합병하였고, 1956년부터 정관에 사업목적을 추가하여 항만준설업·광산개발업·건재생산업·선박건조업에 이르기까지 사업영역을 확장시켜나갔다. 1962년도에는 도급한도액 1위를 달성하였으며, 1964년 11월 국내 최초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인 마포 아파트를 건설하였다.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에만 그치지 않고 1965년 국내 건설업체 최초로 세계 16개국 29개 업체와의 경쟁 입찰에서 540만 달러 규모의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수주함으로써 해외시장을 개척하였다. 무리한 경쟁 입찰과 건설공사 장비 및 경험 부족으로 많은 손해를 보았지만, 그 직후인 1967년 베트남 캄란에 진출하여 항만 준설 등 각종 공사를 수행함으로써 태국에서의 적자를 만회하고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리고 1968년 당시 사이공·홍콩·방콕·쿠알라룸푸르 등 동남아시아 각국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해외건설 시장 활성화에 주력하였다. 1969년에는 괌에 진출하여 주택건설공사를 수주하였다.

태국에서의 고속도로 시공 노하우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져서, 당시 국내 건설업체 중 현대건설이 주도적으로 이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경인고속도로 공사, 통일로 공사 등도 수행하여 국내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기간산업에 주력하여 1970년대에는 소양강의 다목적댐을 비롯하여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였고, 평택화력발전소와 고리원자력발전소 등 국내 각종 발전소 건설에서도 시공 능력을 인정받았다.

한편 1975년에는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공사를 수주하면서 중동에 진출하였다. 1976년에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일컫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축항공사를 9억 3,000만 달러에 수주하였는데, 이는 당시 국내 예산액의 절반을 넘는 금액으로 국내외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현대건설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 이른바 ‘중동특수’를 누려 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예멘 등 각 나라에서 다수의 공사를 수행하였는데, 1981년에는 도급 한도액 1조 원을 돌파하였다. 1980년대에는 해외건설사상 최대 규모의 철도공사인 이라크 북부 철도공사를 9억 6,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등 중동특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한편, 동남아시아의 대형 공사 수주도 활성화되어 싱가포르의 마리나센터와 말레이시아의 페낭대교 등을 건설하기도 했다. 1985년 완공한 페낭대교는 총 길이가 13.5km로, 당시 아시아에서 최대, 세계적으로 3번째 긴 다리였다. 1988년에는 남극 세종과학기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및 화력 등 각종 발전설비 공사를 진행하였다. 특히 중동특수 때 사용하던 건설 장비를 국내로 들여와 1989년 서산간척지를 준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지도를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도 국내에서는 영광원자력·태안화력 등 발전소 설비공사와 88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공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해외공사로는 중동특수가 끝나고 동남아시아로 건설이 집중되어 싱가포르의 창이공항, 파키스탄의 차스마 수력발전소, 방글라데시의 자무나 교량 등의 대표적인 공사를 수행하였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현대건설은 경영권 분쟁에 시달리는 일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5남인 정몽헌 회장에게 현대그룹 경영권을 인계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을 때, 당시 2남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반기를 들면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2001년 현대건설은 유동성 위기를 맞아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되어 외환은행·산업은행 등으로 구성된 채권단의 공동 관리 체제로 전환되는 위기를 겪었다. 그로부터 5년만인 2006년에 워크아웃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9월 ‘힐스테이트(HILLSTATE)’라는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를 론칭하는 등 기업 이미지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워크아웃 졸업 후 해외건설 공사 수주에도 주력하여 2009년 31억 달러 규모의 UAE 원전 공사를 수주하여, 최초로 한국형 원전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편 현대건설은 계열분리가 되어 채권단 공동 관리 체제가 된 지 10년째 되던 2010년에 가서야 본격적인 매각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참여하였는데, 채권단은 먼저 현대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자금 여력 부족으로 매각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2011년 1월 채권단은 다시 현대자동차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된 이후 현대건설은 해외건설 수주에 주력하여 재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2010년대에 해외에서 수주한 대형공사만 해도 쿠웨이트의 자베르 코즈웨이 해상교량공사를 비롯하여, 베네수엘라의 푸에르토 라크루즈 정유공사 확장 및 설비개선 공사, 이라크의 카르발라 정유공장 공사 등 20~60억 달러 이상 되는 공사들이 많았다. 그 결과 2013년 11월 국내 최초로 해외수주액 누계 1,0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2016년에는 쿠웨이트 알주르 LNG 수입터미널 공사를 15억 2,000만 달러에 수주하였으며, 같은 해에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영업이익 1조 원을 달성하였다.

현황

현대건설은 창립 이후 현재까지 70년 동안 국내외의 대형공사를 꾸준히 수주하여 시공함으로써 글로벌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성장해왔다. 사업분야는 크게 인프라환경사업·건축사업·플랜트사업·전력사업의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2016년 말 기준 매출액은 18조 7,445억 원이며, 영업이익은 1조 527억 원이다.

참고문헌

『2017년 한국기업연감』(매경출판사, 2017)
『현대건설 60년사』(현대건설, 2008)
현대건설(www.hde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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