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 ()

불교
인물
해방 이후 수덕사 조실, 덕숭총림 방장 등을 역임한 승려.
이칭
혜암(慧庵)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4년(고종 21)
사망 연도
1985년
본관
강릉(江陵)
출생지
황해도 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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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수덕사 조실, 덕숭총림 방장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강릉최씨(江陵崔氏). 속명은 순천(順天). 법호는 혜암(慧庵). 황해도 배천(白川) 출신. 아버지는 사홍(四弘)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896년 부친상을 당하자 이듬해 출가하여 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삭발하였다. 1900년 보암(保庵)을 은사로, 금운(錦雲)을 계사(戒師)로 하여 득도(得度)하였다.

이 무렵 의탁할 곳이 없는 어머니를 절에 모시고 살았다. 1902년 어머니가 죽자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행하였고, 1908년 통도사 내원선원(內院禪院)에서 처음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가 참선수행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그는 “신령의 힘으로 색신(色身)을 입고 벗기에 임의자재하는 신통력을 얻어야지, 법문을 들어서 무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자 내원선원의 조실(祖室) 성월선사(性月禪師)는 “선방의 밥은 썩은 밥이 아니다.” 하고 쫓아내었다. 세 번을 들어갔다가 쫓겨난 뒤 양산으로 가다가, 그 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지도를 받은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다시 돌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성월선사는 그의 편견과 아집을 지적하여 주었다. 이때부터 법문을 들으며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였다.

1911년 해담화상(海曇和尙)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성월선사의 밑에서 선(禪)을 공부하였으며, 1913년 성월선사로부터 화두(話頭)를 간택받았다.

그 뒤 만공(滿空)·혜월(慧月)·용성선사(龍城禪師)를 차례로 모시고 6년 동안 용맹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동정(動靜)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語默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그 뒤 묘향산 상원사(上院寺) 주지와 정선 정암사(淨巖寺) 주지를 역임하였고, 1929년 수덕사의 조실 만공선사로부터 오도를 인가받고, “구름과 산은 다름 없으나 또한 대가풍도 없다. 글자 없는 도장을 그대 혜암에게 주노라(雲山無同別 亦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慧庵汝).”라는 전법게(傳法偈)를 받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 뒤 전국의 주요사찰을 순례하면서 보임(保任:깨달은 내용을 더욱 갈고 닦음)을 하는 한편, 참선수행자들을 지도하다가,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또, 1984년에는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의 능인선원(能仁禪院) 봉불식(奉佛式)에 참여하여 우리 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고 귀국하였으며, 1984년 말에 설립된 덕숭총림(德崇叢林) 제1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마지막까지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즐기다가 1985년 삼월삼짇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이 육신을 간단히 화장하여 사방에 흩어버릴지언정, 결코 사리(舍利)를 수습하거나 부도(浮屠)를 세우지 말라. 만약 탑이나 부도를 세우면 나는 세세생생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대의(大義)·법우(法雨) 등이 있다.

참고문헌

『혜암 큰 스님 법어집』(밀알, 1985)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홍법원, 1990)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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