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대전』은 1905년 대한제국 정부가 『대명률』, 『대전회통』과 새로 반포된 법률을 종합, 절충하여 편찬한 형사법전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표방한 구본신참 원칙에 따른 입법의 산물로서 법전의 편제 면에서 외국 형법을 참고하고 갑오개혁 이후의 형사법제 개정의 결과를 계승하고 있으나, 범죄와 형벌에 관한 규정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전통적 형률의 원칙과 규정을 답습하였다. 1906년과 1908년 두 차례 개정을 거쳐, 1912년 조선형사령에 의해 일본의 형사법이 의용되면서 폐지되었으며, 1917년까지 일부 규정이 효력을 유지하였다.
1905년(고종 42) 4월 29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은 대한제국 정부가 『대명률』과 『대전회통』, 갑오개혁 후 새로 반포된 법령, 외국법을 참고하여 집성하여 편찬한 형사법전이다. 그 반포 조서에 따르면, 신구의 형사법이 혼재하고 자주 개정, 폐지되어 법집행자와 수범자의 혼란과 의문이 더해지는 상황을 개탄하여 선왕의 법을 기본으로 삼고 외국의 법령을 참고하여 제정하였다.
1895년(고종 32) 1월 7일[음력 1894년 12월 12일] 반포된 홍범 14조에서 민법과 형법을 엄명히 제정할 것임을 천명한 이래 형법 제정 작업은 내외 정세의 영향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개화파 정권하에서 일본인 고문에 의해 일본 형법[1880년]을 모방한 형법안 기초가 개시되어 1896년(고종 33) 6월에 완성된 형법 초안이 1897년(고종 34) 2월 법부에 제출되었으나, ‘구본신참(舊本新參)’ 노선을 표방한 대한제국 정부는 『대명률』과 『대전회통』을 기본으로 삼아 보통형법과 군형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1898년(고종 35) 5월 법부 산하에 설치된 법률기초위원회에서 보통형법 제정을 위한 조사와 기초에 착수하여 1900년(고종 37) 12월 형법 초안이 완성되었다. 이후 법부 관료를 비롯하여 법률에 밝은 관리들로 임명된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이 1901~1904년에 걸쳐 초안을 심의, 교정하였다.
『형법대전』의 초안으로 『형법초(刑法草)』[국립중앙도서관, 일산 古6630-2]와 프랑스인 법률고문 로랑 크레마지(Laurent Crémazy)가 대한형법(大韓刑法)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Le Code Pénal de la Corée』[1904년 7월 발간]가 남아 있다.
『형법대전』은 총 5편, 16장, 158절 본칙 678개조, 부칙 2개조로 구성되어 있고 국한문으로 작성되었다. 구 법전의 형사 관계 규정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갑오개혁기 이래 개정된 형벌 제도에 관한 통칙을 정한 형률명례(刑律名例)[1896년 법률 제3호], 특정 범죄에 대응하고자 제정된 적도처단례(賊盜處斷例, 1896년 법률 제2호), 우체사항 범죄인 처단례[1896년 법률 제9], 의뢰외국 치손국체자 처단례(依賴外國致損國體者處斷例)[1898년 법률 제2호] 등 그동안 제 · 개정된 법령의 내용을 흡수하는 한편, 외국 형법을 참고하여 법전을 편제하고 새로운 처벌 규정을 마련하였다.
법전의 편제 면에서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6분 체제를 버리고 총칙에 해당하는 법례(法例), 죄례(罪例), 형례(刑例)와 각칙에 해당하는 율례(律例)를 두었다. 제1편 법례에서는 이 법의 적용에 관한 통칙, 제2편 죄례에서는 범죄의 종류, 공범, 미수, 재범, 누범, 불처벌 사유 등, 제3편 형례에서는 형벌[사형, 유형, 역형, 금옥형, 태형]의 종류와 집행 방법, 각종 범죄에 따른 처단 및 가감의 예, 수속(收贖), 보방(保放) 등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제4편과 제5편의 율례에서는 반란소간율(反亂所干律)부터 잡범율까지 14개 장에 걸쳐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범죄와 형벌의 내용 면에서 『형법대전』은 구 법전의 조문을 새로운 체제에 따라 재배치하고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것에 머물렀다. 유추해석을 허용하는 인율비부(引律比附)[『형법대전』 제2조], 처벌 대상 행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한 자’를 벌하는 불응위율(不應爲律)[제678조] 등의 규정은 『형법대전』이 답습한 구법의 범죄와 형벌 체계 아래에서는 나름의 필요성과 합리성이 인정되지만, 근대 형법의 죄형법정주의 원칙과는 충돌한다. 노비제 폐지, 반상 차별 철폐 등 사회개혁 성과를 수용하고 있지만, 관과 민, 상관과 부하, 존장과 비유, 남편과 처첩 사이의 차등 관계를 보호하는 기존의 규정들은 유지되었다. 비리호송(非理好訟) 금지, 주민의 관할 수령에 대한, 부하의 상관에 대한 고소 금지 등 왕조시대에 마련된 억압적인 소송 규제책도 존속되었다.
1906년(고종 43) 2월, 『형법대전』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관직의 변경 등을 반영하기 위해 부분 개정되었다[1906년 법률 제1호]. 1908년 7월에는, 정미칠조약[1907년 7월]과 새로운 「재판소구성법」[1907년 12월]에 따라 일본인 사법관을 주축으로 구성된 재판소의 개청[1908년 8월 1일]을 앞두고 사법제도가 대폭 개정됨에 따라 『형법대전』에서 불필요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규정들이 대거 삭제되었다[1908년 법률 제19호]. 1912년 3월 공포된 조선총독부 제령 제11호 「조선형사령」에서 일본의 형법, 형사소송법 등이 의용되고 『형법대전』이 폐지되었다. 다만, 『형법대전』 중 모살 · 고살 · 존속살해, 강도 · 절도의 살인 · 강간의 기수 · 미수를 처벌하는 규정의 효력은 당분간 존속되었는데[「조선형사령」 부칙 제41조], 1917년 12월 「조선형사령」이 개정되어 이들 잔여 조항도 효력을 잃었다.
『형법대전』은 대한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형사법전 제정 작업의 산물이다. 『형법대전』의 시행과 함께 『대명률』과 『대전회통』, 새롭게 반포된 법령들 속에 흩어져 있던 형사 관계 규정들이 『형법대전』이라는 하나의 법전으로 통합되고 정돈되었다. 조선시대 이래 형사법은 중국에서 계수한 『대명률』과 조선 고유의 법으로 구성되었으나, 이제 대한제국 정부가 제정한 『형법대전』이 중심이 되는 형사법령 체계가 성립한 것이다.
『형법대전』과 같이 중국의 전통 형률과 서구 근대법의 절충을 시도한 입법례는 메이지 일본의 ‘신율강령(新律綱領)’[1870년]과 그 개정법인 ‘개정율례(改定律例)’[1873년], 청말 중국에서 작성된 ‘대청현행형률(大淸現行刑律)’[1910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 일본과 청의 형사법령은 서구 근대형 사법제도로의 단계적 전환을 전망하며 과도기의 형사법으로서 마련되었다. 『형법대전』은 그러한 전망하에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서구 근대적 형사법제를 수용하는 데에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형법대전』은 대한제국의 구본신참 노선에 따른 자주적 입법 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