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홍재희(洪在羲).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왕후 민씨(이후의 명성황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2년 5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걸고 모였을 때,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임명되어 경군 600명을 이끌고 청주로 출동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장위영군사 800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 해 5월 31일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하여 점거되자, 총공세를 취하지 않고 위협적인 포격만 가함으로써 되도록 회유하여 해산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全琫準)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임으로써 6월 10일(음력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 농민군은 유혈싸움 없이 철수하였다.
한편,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고 있을 무렵 영광에 출진하여 관군의 힘으로는 이를 진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판단하고, 국왕에게 직접 전황을 보고하고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동학농민군의 예봉을 꺾은 공으로 훈련대장으로 승진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충의(忠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900년에 이경직(李耕稙)과 함께 장충단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