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홍소죽(洪蘇竹), 경기도 수원 출신.
1910년대에 시베리아와 만주일대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1920년『조선일보』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지냈다.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될 때 여기에 참가하여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3년 7월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1924년 9월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4년 11월 사상단체 화요회에 참여하였다. 화요회가 오르그뷰로의 표면단체 역할을 하며, 그 역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2월부터 화요회그룹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했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의 검사위원회 책임자,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 경성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1926년 6월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촉발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출옥한 이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화요회그룹 출신자들의 비밀조직인 공산주의자그룹의 결성에 참가하였다. 1945년 9월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때 상임위원 및 조직부장이 되었다. 1946년 11월에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6월 25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