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형제(亨諸), 호는 만회(晩悔)·후포(後浦). 홍윤우(洪允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덕수(洪德壽)이고, 아버지는 판결사 홍사효(洪思斅)이며, 어머니는 김수연(金秀淵)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몇 차례 왕에게 상소하였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먼저 성균관의 문묘(文廟)를 합리적으로 관리할 것과 요망한 말을 지껄이는 간신배들을 처벌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문과급제 이후로 1617년에는 호조좌랑, 이듬해는 예조좌랑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당시 봉산군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그 이듬해는 다시 동래부사로 영전하였다.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1626년(인조 4) 경상도관찰사 원탁(元鐸)의 추천에 의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 뒤 1628년 승지로 발탁되었고, 1638년에는 참찬관이 되었다.
이 때 그가 경연에서 낮강의를 마친 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온 경상좌도 지방에 발생한 흉년의 참혹한 상태를 시급히 구제하자고 역설하였다.
1639년 예조참의가 되어 하였는데, 이때 영릉수호군들과 마찰이 생겨 그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말썽이 생겨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청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43년에는 다시 좌승지로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