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8년(공민왕 7) 판태상시사(判太常寺事)로서 원나라에 인삼을 바쳤고, 1363년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백관기로(百官耆老)의 서(書)를 어사대·중서성·첨사원(詹事院)에 바쳤다.
이 때 원나라에서는 기황후(奇皇后)·최유(崔濡)·김용(金鏞)과 모의하여 덕흥군 왕혜(德興君 王譓)를 고려왕으로 삼고, 연경(燕京)의 고려인을 모두 위관(僞官)으로 임명하여 1364년 최유와 함께 요양성병(遼陽省兵) 1만을 인솔하고 의주에 침입하였으나, 이자송(李子松)·김유(金庾)·황대두(黃大豆)와 함께 이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최유의 군사가 도지휘사 안우경(安遇慶), 찬성사 최영(崔瑩)에게 패하고, 이 해 9월 이자송 등과 환국하니 각각에게 미두(米豆) 30석이 하사되었다. 10월에 지도첨의 겸 감찰대부(知都僉議兼監察大夫)가 되고 서북면순문사를 겸하고 이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