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첨의중찬(僉議中贊) 홍규(洪奎)의 아들이다.
1316년(충숙왕 3) 삼사사(三司使)가 되어 왕이 사냥을 즐기므로 자주 수행하였다.
밀직 나유(羅裕)의 딸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고, 만호 황원길(黃元吉)의 딸과 재혼하였으나 자색이 뛰어나 항상 방안에 두고 친척이라도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충혜왕은 홍규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소생이므로 홍융(洪戎)에게는 생질이 되는데, 홍융이 죽은 뒤 내수(內豎) 최화상(崔和尙)이 황씨가 절색이라고 칭찬하자 충혜왕이 밤중에 그 집에 가서 사음(私淫)하고 금은기채백(金銀器綵帛) 등을 주었다 한다.
남양군(南陽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시호는 장간(莊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