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7월, 내선일체의 황민적 각성, 전쟁 중 황민 책무 완수, 화북 재주 조선인의 협력·친화를 목적으로 북경일본대사관에서 만들게 하였다.
그 중앙기구가 ‘화북반도인협회’이며, 하부 조직은 화북 일대 각지에 조직된 ‘협려회(協勵會)’이다. 협려회는 설치된 지역명을 붙여 북경협려회·제남협려회(濟南協勵會) 등으로 불렀다.
북경일본대사관에 사무소를 두었던 화북반도인협회는 관변측의 「조선인 지도 요강」을 실천하기 위해서 조직된 만큼 관변측 인사를 총망라, 일본인 기타자와(北澤直吉 : 북경총영사)·도야마(富山修 : 총독부 북경출장소장) 등 다수와 한국인 현영섭(玄永燮)·김진민(金振玟 : 북경일본대사관 조선과) 등이 수뇌부로 참여하였다.
이들 본부 기관은, 각지의 협려회를 통해 「조선인 지도 요강」이 규정하는 조선인 지도 방법으로 화북 일대 조선인을 통제하였다. 대강의 ‘지도 방법’은 아래와 같다.
소년층에 통일된 일선공학(日鮮共學)과 졸업생 특별 지도를 실시해 일어교육을 완수한다. 청년층에 대정익찬(大政翼贊)운동의 훈련 기관 및 예비적 보충 훈련을 실시해 흥아전사(興亞戰士)를 양성한다. 성인층에 협려회 가입을 유도하여 황민화, 시국 인식 및 내선 일체를 고양(高揚)시킨다.
부인층에 국방부인회에 가입하게 하여 황도 여성의 책무를 완수하게 한다. 무직자·부정(不正)업자에 민단·협려회를 통한 직업 알선으로 황민적 정업(正業)에 종사하게 한다.
협려회는 북경·제남·청도(靑島)·보정(保定)·개봉(開封)·신향(新鄕)·태원(太原) 등 화북 일대와 몽고 경계 지역인 장가구(張家口)·대동(大同)까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영사관과 거류민단에 사무소를 두고, 영사관·헌병대·특무기관·군부대·경찰서·거류민단 요인을 고문역·상담역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대표이사·이사·평의원이 관내 몇 구(區)의 구대표를 지휘하면, 구대표가 그 하부인 몇 명의 반장을 통해 반원인 협려회원을 통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