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윤지(允之). 황휘(黃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황처신(黃處信)이고, 아버지는 형조좌랑 황환(黃瓛)이며, 어머니는 진사 안종해(安宗海)의 딸이다. 종형 황경원(黃景源)으로부터 수학하였다.
1765년(영조 4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177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73년 정언이 되었으나,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조영순(趙榮順)의 불경(不敬)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는 대론(臺論)에 반대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장류(杖流)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1778년(정조 2) 부교리로 검토관을 겸하였고, 이 해 겨울 영남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복명하였으나, 안찰(按察)이 부실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781년 다시 서용,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지에 올랐으나, 일 처리를 소홀히 하여 파직되었다.
곧 다시 대사성으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실수를 범하여 삭직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대사헌·이조참판·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797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개성부유수로 나가서는 왕에게 건의하여 국경수비에 힘썼다.
그 뒤 예조판서·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1800년(순조 즉위년)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당시 강화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은언군 인(恩彦君 裀: 사도세자의 서자)의 탈출사건이 일어나 파직되고, 이어 김해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와 형조판서가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1807년 상호군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일통표(一統表)』와 시문집 약간이 가장되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