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이조판서 황흠(黃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서하(黃瑞河)이고, 아버지는 호조참판 황재(黃梓)이며, 어머니는 권욱(權煜)의 딸이다. 1751년(영조 27) 영조의 제10녀 화유옹주(和柔翁主)와 혼인하여 창성위(昌城尉)가 되었다.
영조가 죽자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부터 1793년에 이르기까지 17년 사이에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 1회,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3회, 동지정사 1회, 성절 겸 사은정사(聖節兼謝恩正使) 1회 등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앞서 1784년(정조 8) 동지 겸 사은정사로 연경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이승훈(李承薰)이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관계서적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사로서 이 사실을 몰랐다 하여 책임추궁을 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