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 초상은 고려 후기의 주자학자인 안향을 그린 초상화이다. 세로 37㎝, 가로 29㎝로, 영주시 소수서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지칭되는 인물이다. 『회헌실기』에 의하면 이 영정은 안향 사후 12년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그려졌다. 화폭 상단의 찬문은 안향의 아들 안우기가 썼다. 인물은 홍포에 낮은 평정건을 쓰고 있으며 흉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이다. 단아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법 자체는 단순하다. 이 영정은 초상화가 드문 고려 시대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고 세로 37㎝, 가로 29㎝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향은 흥주(興州)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지칭되는 인물로서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화폭 상단의 찬문은 안향의 아들 안우기(安于器)가 쓴 것이다. 이 영정은 안향이 죽은 지 12년 뒤인 1318년(충숙왕 5)에 학교를 세운 공을 치하하여 충숙왕이 문묘에 도형하고 고향인 흥주에 치제(致祭)할 것을 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회헌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화폭의 상단에 기재된 찬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 영정은 당시 왕명으로 공자의 묘정에 형상을 그려 봉안하게 될 때, 흥주수(興州守)였던 최림(崔琳)이 도목(都目)에 의하여 1본을 더 모사하여 향교에 봉안하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문묘본과는 동형동규(同形同規)의 본이며, 제작 시기도 별 시차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영정은 흥주향교에 봉안되어 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1457년(세조 3) 부(府)가 폐해지자 일시 한도(漢都)의 종손가〔知歸家〕로 옮겨졌다. 그러나 1542년(중종 37) 평소 안향을 사숙해오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에 안향의 사묘(祠廟)를 건립하고 8월경 영정을 이안하여 갔다. 다음해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뒤의 소수서원)이 세워지고, 영정은 여기 봉안되었다.
그 뒤 1559년(명종 14) 영정이 오래되어 갈라지고 찢어져 장차 아주 없어질 것을 염려한 예조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당시 고수(高手)로 이름났던 화원 이불해(李不害)가 이모본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 이모본이 일시 봉안된 일이 있었음이 『소수서원화상개수지(紹修書院畵像改修識)』에 수록되어 있다. 허목(許穆)은 안향의 14대손 응창(應昌)이 다시 2본을 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사본은 상하 이분되어 상부 공간에는 찬문을 쓰고 화상은 화면의 하반부를 점유하고 있다. 인물은 홍포에 낮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으며, 흉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이다. 이 화상 자체는 낡은 화폭이지만 기품에 대한 기록을 고려하면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고려시대 본이 아니라 이불해의 모사본으로 생각된다.
단아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필법 자체는 단순하다. 부드럽고 엷은 주선(朱線)으로 안면의 윤곽을 나타냈다. 그리고 구륵(鉤勒)처리만으로 안모(顔貌)의 오관부(五官部)를 한정시키고 있다. 옷주름은 굵기의 변화가 없는 선조에 의하여 음영 없이 간략히 처리되었다. 그러나 안면에서 방사되는 시선의 방향과 공수(拱手) 자세에서 비롯된 어깨선은 이 초상화 전체에 강직한 인상을 부여한다.
화폭 상단에 기재된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국유학제거 도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문성공 안향 초상화〔宣授高麗國儒學提擧都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贈諡文成公 安珦 眞〕
충숙왕 5년(1318)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명령을 내렸는데 그 조목은 다음과 같다. “도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안향은 학교를 크게 일으킨 공이 있다. 그러니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안향의 초상화를 그려 모시고 고향에서는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흥주(興州, 경상북도 순흥)수령 산랑(散郞) 최림(崔琳)이 그 조목에 의거하여 초상화 한 부를 모사하여 향교에 모셔 두려고 할 때 아들인 나 우기(于器)는 마침 지방에 진변사(鎭邊使)로 근무 중이었다. 최림이 초상화를 나에게 보내주니 향을 사르고 절을 하며 찬양하는 글을 짓는다. 선군께서는 당시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기풍을 크게 일으키어 임금께서 문묘(文廟)에 초상화를 그려 모시게 하였다. 또 다른 한 폭 초상화는 고향에서 빛나니 사계절 제사를 올리면서 큰 공로에 보답한다. 1318년 9월에 지음. 경상전라도순무진변사 광정대부 검교청의평리 겸판전의시사 상호군 안우기 삼가 씀.〔越延祐五年二月日降宥旨, 其目云, 都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安珦, 有崇設學校之功. 亦於夫子廟庭圖形, 致祭桑鄕. 興州守散郞崔琳, 依其目, 摹寫一軀, 將安之于鄕校時, 嗣子于器適承乏鎭邊. 崔君送以示之, 於是焚香拜手, 乃爲之贊曰. 先君當日振儒風 上命圖形文廟中 一幅丹靑照桑梓 四時籩豆荅膚功 是年秋九月日贊 慶尙全羅道巡撫鎭邊使匡靖大夫檢校僉議評理兼判典儀寺使上護軍 安于器 拜題〕
안향이 숭경의 대상이었던 만큼 그의 초상화는 소수서원 이외에도 전국 도처에서 후손 및 유림에 의하여 분향 · 예배되어 왔다. 안향 초상은 순흥의 대룡산영당(大龍山影堂), 춘천의 가산영당(佳山影堂), 재령의 송양사(松陽祠),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연기의 합호서원(合湖書院)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로는 합호서원 순흥 안씨 종중에 소수서원본과 형식과 크기가 같은 본이 전해올 뿐이다. 필치가 경화되고 덧칠이 심하여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훼손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영정은 『회헌실기』에 적혀진 바대로 왕명에 의한 문묘본을 저본으로 하여 누차 이모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영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의 초상화일뿐 아니라 고려시대 초상화가 드문 상황에서 고려시대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