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년(숙종 32)에 증원(證元)이 찬한 「김해명월사사적비(金海明月寺事蹟碑)」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고교(高橋) 밑에서 왕후 허씨(許氏)를 친히 맞아 들여 환궁하였는데, 이때 허씨는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게 폐백을 올렸다고 한다. 왕은 그 신령스러움에 감동하여 산의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고, 세자를 위해 신국사(新國寺)를, 왕후를 위해 진국사(鎭國寺)를, 본인을 위해 흥국사를 지어 나라의 융성함을 빌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7년(광해군 9) 대웅전과 승당(僧堂) · 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1706년 일원(一元) · 일혜(一惠) · 상진(尙眞) · 응준(應俊) 등이 중수하였는데, 그때 담 밑에서 건강원년(建康元年, 144) 3월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에서 들어와 불도를 전하니 왕이 중신숭불(重信崇佛)하였다는 명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뒤 한동안 폐사가 되었던 것을 김원두(金元斗)가 옛터를 되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였고,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부근에서 발굴하였다는 조각 석물이 있다. 높이 60㎝, 너비 80㎝ 정도인 좌불(坐佛)을 양각하고, 그 좌우에 코브라뱀이 불상을 옹호하듯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의 불교조각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인도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사찰측에서는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사찰 오른쪽에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遺墟碑)와 증원이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정원 복판에는 1986년에 세운 오층관음보탑과 석등 · 사적비 등이 있다. 이 절은 불교의 남방전래설 연구와 가락불교의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는 중요한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