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원회는 전신인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대신해서 설립된 위원회로서, 임시위원회의 사업을 계승하고 유엔 결의에 명시된 한국 정부의 지위에 유의하여 모든 국정을 수행하도록 결정하였다.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주관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지원하였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양국은 향후 한국의 신탁통치를 위한 임시정부 수립과 관련된 합의 도출에 실패하였다. 이에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미소 공동위원회로부터 분리시켜 한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시키기로 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정식으로 한국 독립문제를 유엔에서 토의하는 조치로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제기하였다. 유엔정치위원회에서 미국안이 가결됨으로써 중화민국·호주·캐나다·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공화국 등 9개국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 1월서울에 도착한 UNTCOK는 소련의 비협조로 효과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위원단 내부에서의 의견대립, 한국 내 정치세력들의 압력과 반대 분위기, 당시 좌익의 총파업 등으로 독자적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결과 동년 2월 26일에 개최된 유엔 소총회에서 토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미국이 주장한,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총선 실시주장이 관철됨으로써 위원회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동위원회는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의 단독선거 실시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하였다.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 설치와 총선거에 관한 결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국국민 자치의 문제이며, 그 자유와 독립에 관련된 문제이므로 이 문제는 그 지역 주민의 대표의 참석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므로, 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한국 국민의 대표들을 본 문제에 심의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며, ② 공정한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한국 전역을 통하여 여행·감시·협의할 권한이 부여되는 9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둘째 ①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이 위원단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② 선거 후, 가급적 빨리 국회를 구성, 정부를 수립하며, ③ 정부는 남북한의 군정당국으로부터 정부의 제기능을 이양 받고 자체의 국방군을 조직하며, 가급적 빨리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이 철수하도록 조치한다.
한국전쟁 와중에 개최된 제5차 국제연합총회는 1950년 10월 ① 국제연합한국위원회의 임무를 인수하고, ② 한국의 통일·독립·민주정부를 수립하며, ③ 한국의 구조 및 재건을 임무로 하는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의 설치를 결의하였다. 그 후 한국 통일문제의 국제적 해결은 일시 국제연합의 테두리를 벗어나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의에 기대한 바가 컸으나 실패, 같은 해 제9차 국제연합총회 이후 또 다시 국제연합으로 이관되었다.
1968년 제23차 국제연합총회 이후 소련·동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제기되었던 UNCURK의 해체 및 주한 국제연합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미국 등 자유진영의 반대에 부딪쳐 매년 부결되었다. 1971년의 제26차 국제연합총회에서는 국제연합에 있어서 중화민국 대신 중국의 대표권을 획득한 중화인민공화국도 UNCURK의 해체 및 주한 국제연합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UNCURK는 한국 통일과 부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매년 제출하는 등 많은 기여를 하였으나, 남북대화와 긴장완화를 계기로 한국에서의 임무 완수를 확인하고 1973년 12월 28일 제28차 총회에서의 만장일치 결의에 따라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전후 미국의 세계적 역할은 이념적 상극현상을 극복하고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 걸쳐 추진되었다. 미국은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분위기 조성과 대책 준비에 골몰하게 되었으며, 정부 수립에 필요한 전국적 대표성과 정통성 지닌 대표 선출을 위한 총선거 실시를 위해 유엔의 권위를 빌고자 유엔에서 유엔임시위원단 구성을 주도하였다. 미국은 북한에서 이미 1947년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점을 우려, 이승만의 단정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과 임시위원단은 남북협상 시도와 남북연석회의 등에 대하여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미국은 전후의 세계전략에 따라 남한에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결정하여 임시위원단의 임무 수행을 적극 후원하였다. 위원단은 남한에서의 다양한 계층의 여론 수렴이 결여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와 이후 정부수립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반공노선에 입각하여 자유주의진영에 합류하였고,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