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7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에서 아버지 홍창식(洪昌植)과 어머니 박도남(朴道南)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윤이정(尹二貞)과 결혼하여, 슬하에 기원(起元) 등 7남매를 두었다. 1927년 월곡의숙(月谷義塾)에 입학하였다. 이후 화순군능주 공립보통학교(1928∼1930)와 일본 와카야마(和歌山) 시립상공학교(1933∼1937)를 졸업하였다.
1948년 10월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1953년 6월 광주시 궁동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57년 광주 지방법원 판사, 1960년 광주 고등법원 판사, 1961년 대전 지방법원 강경지원장, 1962년 광주 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한 후, 1963년 광주시 궁동에서 다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1964년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전남지부 지도위원,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전남 부위원장, 1967년 6·8부정선거 전면무효화투쟁위원회 전남지부 위원장,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전라남도 위원장, 1971년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전라남도 대표이사, 1975년 민주회복 국민회의 전라남도 대표 상임위원, 1977년 국제사면위원회 전남지부 고문, 1980년 민주헌정 동지회 중앙위원 및 광주 5·18사태 수습대책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0년 12월 29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이 언도되었으나 지휘관 확인과정에서 15년으로 감형되었다. 1981년 12월 25일 성탄절을 기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4년 광주 5·18구속자협의회 회장, 1985년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1986년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을 맡았다. 1990년 호남합동법률사무소를 개설하여 대표 변호사로 활동했다.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5년 동안 투병하다가 2006년 10월 14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