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본당은 1896년 4월 26일,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가 갓등이(왕림)본당 관할 하의 미리내 공소에 한국 천주교회에서 세 번째로 서품된 방인사제인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를 첫 본당신부로 파견함으로써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강도영 신부는 1896년부터 1929년까지 약 33년간 이곳에서 본당사목을 하면서, 본당 구역 내의 김대건 신부의 묘역을 관리하면서, 1928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경당을 건립했다. 이에 앞서 강도영 신부는 1907년 교우들을 포함한 지역주민들을 위해 해성학원(海星學院)을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을 벌였고, 1924년경에는 성당 인근에 해성제사(海星製絲) 공장을 건립하고 주민들로 하여금 뽕나무를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잠업전수소(蠶業傳受所)를 설립하여 양잠기술을 보급함으로써, 교우들과 지역주민들의 생계에 큰 보탬이 되게 하였다. 1963년 수원교구가 설정되면서 매년 미리내에서 순교자 현양대회가 개최되었고, 1991년에는 1984년 시성된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을 기념하는 대성전이 건립되는 등 성역화 작업이 본격화되어, 미리내성당은 단순히 지역 신자들을 사목하는 본당에 머물지 않고 순교신심을 배양하고 순교자를 널리 현양하는 순례지사목을 겸하는 성지로도 유명해졌다.
1896년 미리내 본당이 설립된 것은 모본당인 갓등이본당의 관할지역이 광범하고 그 소속 공소와 신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기존의 1개 본당만으로는 사목활동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보다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해 왕림본당 소속의 미리내 공소를 중심으로 안성, 용인 일대를 관할하는 새로운 본당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846년 이전에 이미 미리내에는 최(崔) 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소가 설정되어 있었고, 1845년 연말부터 1846년 부활절 전후까지 약 46개월간 김대건 신부가 이곳 미리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양지, 광주 등지를 순방하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후 1860년대 초반 깔래(Calais, 姜, 18331884), 오메트르(Aumaître, 吳, 1837~1866)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곳 미리내에 머물며 조선말과 풍습을 익히면서, 신자들을 사목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이곳도 일시 교우촌이 파괴되었다가, 개항 전후부터 다시 교우들이 모여 1883년 뮈텔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미리내 공소로 설정되었다가, 1896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미리내본당으로 설립되었다. 본당 설정이후 중간에 몇 번 본당사제가 파견되지 않아서 인근 본당의 공소가 되기도 했으나, 1976년 미리내 수도회가 들어오면서부터 준본당을 거쳐 정식 본당이 되어 2011년 오늘에까지 이른다.
미리내 성당은 김대건 신부와 무명순교자들의 순교신심을 현양하는 성지[순례지 사목]의 역할을 겸하면서, 인근지역의 신자들을 사목을 담당하는 본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미리내 성당은 설립초기인 19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지는 미리내가 포함된 안성을 중심으로, 용인, 이천, 광주 지역에 이르는 지역복음화의 거점성당이었고, 1963년 수원교구가 설정되어 그 소속 본당이 되면서 매년 순교자 현양대회가 열리는 순교신심의 발원처이자, 순교자 현양의 대표적 성지[순례지 성당]으로서의 기능도 겸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