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시대의 ‘천호’(天呼) 마을은 “천주(天主,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는 뜻을 지닌 천주학쟁이들의 거처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마을을 둘러싼 천호산(天壺山)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다. ‘천호산’은 “하늘 아래 호리병[壺]처럼 둘러싸인 외진 산골” 또는 “순교자들의 피를 가득 머금은 병 모양의 산골”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역시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히고 그 후손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지명이다. 천호산 일대에는 가장 큰 마을이자 중심지인 천호(다리실, 용추내),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모두 7개의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천호, 성채골, 산수골 등 3개의 공소만 남아있다.
천호 마을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처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한 시점으로, 주로 충청도 쪽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이주하여 현재 순교 성인들의 묘역 맞은편인 무능골에 정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1866년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6명의 성인(聖人) 중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基植, 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 등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 출신의 3위와 이명서(일명 在德, 18211866, 베드로) 성인을 포함한 모두 4위의 성인이 순교직후 가족들이 이곳 천호동과 인근 시목동 등지로 피신하여 이곳에 순교자의 시신이 묻고 은거하였고, 1877년 입국한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호산 으럼골 등지에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펼쳤다.
1906년 베르몽(Bermond, 睦世榮, 1881~1967) 신부가 1906년 고산본당에 부임하여 신자들과 협력하여 45만평 정도의 천호일대 산지를 매입함으로써 순교자의 묘역과 신자들의 터전을 보존하였다. 1939년 기해박해 순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손선지 등을 비롯한 6위의 순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1983년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되어 김진소 소장 신부 등의 노력으로 정문호, 한재권 등을 비롯한 천호 일대의 순교자의 묘소를 새롭게 찾아서 유해를 발굴한 후, 현재의 순교자 묘역에 이장하였고, 1987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다.
천호성지는 박해시대 신앙선조들의 삶과 죽음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연환경과 순교자 무덤, 집터 등이 잘 보존되어 오는 가운데 교회사연구소와 피정의 집 등이 들어섬으로써 전주교구를 비롯한 한국의 신자들에게 박해시대 순교신심을 배우는 수련장(修鍊場)이자, 호남지방 교회사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